제35회 총회장 최재화 목사(1949년), 제36회 총회장 권연호 목사(1950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5월 29일(화) 09:55

 제35회 총회장 최재화 목사(1949년)
 
최재화(崔載華, 1892-1962) 목사는 경북 선산에서 최도원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서울 경신학당에 입학을 하였으며, 1914년에 졸업을 하였다. 1916년에 도일하여 일본대학 법과에 진학을 하였지만 건강관계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때마침 모교인 경신학당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경신학당 동창인 이갑성을 만나 경신학당 학생을 이끌고 3ㆍ1운동에 참여를 하였다. 다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용상과 함께 경북지방 만세운동 책임을 지고 대구에 내려와 대구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와 김태련 조사를 만나 대구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3월 8일 학생 시민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이만집목사와 김태련 조사는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최재화는 계속 독립만세를 주도하다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일경의 눈을 피해 그해 6월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로 피했다. 그곳에서 학생모집을 위해서 수시로 국내로 잠입을 하였으나 경주 상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상주경찰서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다행히 감시의 허점을 찾아 탈출에 성공하여 중국 상해로 탈출하여 은사인  김규식박사를 만나 항일 무력단체인 의혈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그 후 의혈단과 결별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갖고 중국 화북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1926년 졸업을 하고 화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산동성 다의강(多義講)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28년 길림성 흥원진(興源鎭)교회에서 시무를 하다가 1931년 10년 만에 귀국하여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하였다. 1942년 부산 부산진교회의 청빙을 받고 목회를 하였으나 과거의 전력으로 일경의 감시를 받았으나 해방을 만나 그 교회를 사임하고 대구 서남교회로 목회지를 이동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59년 예장 분열시 합동측에 남게 됐다. 분열의 아픔을 만난 후 곧 은퇴를 하고 그렇게 그리던 동산을 바라보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 공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제36회 총회장 권연호 목사(1950년)
 
권연호(權漣鎬, 1898-1979) 목사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안동 권씨로서 세도가 대단한 집안에서 출생하였던 덕분에 안동 한문사숙을 마친 후에 1912년 상경하여 경성사범학교 단기과를 1914년에 졸업하였다. 잠시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기독교로 귀의하여 경상북도 안동교회에 출석을 하였다. 1916년 평양에 있는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들과 친교를 갖고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터득한 후 곧 숭실전문학교 한 학년을 나두고 다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23년 평안남도 기양교회 전도사로 청빙을 받고 첫 목회 생활을 하였다. 특별히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1936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가을에 평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37년 평안북도에서 몇 째 안가는 철산읍교회의 청빙을 받고 목사로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1940년 신의주 건너편에 있는 중국 안동(현 단동)에 있는 안동제일교회의 청빙을 받고 시무를 하였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권연호목사는 중국 안동에서 목회를 시작하자 그 지역 목사들과 협의하여 1940년 안동제일교회 내에 안동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해방을 만나자 소련군의 진주로 월남을 결심하고 가족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서울 창신교회의 청빙을 받고 23년간 시무를 하였다. 1950년 4월 21일부터 25일까지 제36회 총회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개회됐다. 임원선거는 총회장 권연호 목사가 선출됐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6ㆍ25 한국 전쟁을 만나자 권연호목사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으며, 부산에 있는 목사들과 만나 총회에 대한 걱정이 되서 의논을 하고 9ㆍ28 수복이 됐으니 피난지 부산에서 1951년 5월 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제36회 총회를 속회한다는 소집 공문을 각 노회에 하달하였다. 총회가 속회되었으고 총회 직영신학교 신설하기 위해서 과도 이사를 각 노회에서 2명과 각 선교회 대표로 한 신학위원회를 설치키로 하였다. 다시 수도가 환도하자 권연호 총회장은 창신교회에 부임을 하였으며, 1959년 교파 분열시 합동측을 지지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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