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사건들II - 세 번의 정전사고와 세 번의 기막힌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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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5월 21일(월) 16:17

공연을 하다 보면 가끔 예기치 못한 돌발사건들이 발생하곤 한다. 그러기에 극장 안팎의 모든 시설물과 무대 환경들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최적의 상태로 준비시켜 놓아야 한다. '증언'에서 '길손'이라는 단막극을 공연할 때의 일이다. 극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조명이 꺼져버렸다. 조명조정기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다시 불이 들어와 다행이구나 했더나 잠시 후 또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물론 평소에 잘 훈련된 배우들은 암전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열심히 연기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스태프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결국 밝혀진 정전 원인은 누군가 공연장 복도를 지나가다가 전원선을 발로 차는 바람에 전선이 전원콘센트로부터 빠져버린 탓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관람을 했던 권사님 한 분이 다가오셨다. "참 은혜스러운 공연이었어요. 그런데 조명이 좀… 그런 장비를 갖추려면 얼마나 들어요?" 안쓰러운 마음에 그냥 물어보시는 것으로 알고 대략 얼마쯤 든다고 말씀드렸는데 며칠 후에 그 액수의 돈을 보내오셨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권사님 덕에 '증언'의 순회공연용 조명 시스템이 근사하게 갖춰지게 됐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번째 반전이었다.
 
두 번째 정전사고는 사이판 선교공연 때 일어났다. 성극팀, 찬양팀, 무용팀이 연합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사이판의 다국적 근로자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뜻 깊은 공연이었다. 먼 남쪽 섬나라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화상을 입어가며 조명과 음향 작업을 마치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관객들이 야외무대의 객석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스태프들도 마지막 세팅을 바쁘게 진행하고 있었다. 조명감독이 전원을 켜고 조명조정콘솔의 마스터 레벨을 올리는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타워에 매달린 조명기 수십 대의 전구가 한꺼번에 끊어져버렸다. 속수무책의 낭패였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반쪽 조명만으로 진행했던 그 날 첫 공연은 연출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감동적인 그림을 무대 위에 만들어 놓았다! 측광을 받은 예수님 역의 배우 얼굴에 짙은 음영이 생기면서 예수님의 고뇌가 드러났고, 45도 각의 조명은 뒷 무대로 예수님의 긴 그림자를 신비롭게 드리우고 있었다. 공연 후 현장에서 만난 연극 전공의 어느 교민이 한 말, "오늘 공연 감동적이었어요. 특히 조명이 아름답더군요." 두 번째 반전이었다.
 
세 번재 사고는 극단 '말죽거리'의 '가마솥에 누룽지'를 연출했을 때의 일이다. 한여름 밤 전력 소비가 정점에 이르자 대학로에 있는 변압기 가운데 하나가 터지면서 삽시간에 대학로 절반이 암흑천지가 돼 버렸다. 대형 정전사고였지만 감사하게도 1막이 끝나는 시점에 절묘하게 불이 나갔고, 극장의 비상등 전원이 다른 변압기에 연결되어 있어서 아쉬운대로 쓸 수 있었다. 그날 따라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앞에 연출이라는 죄로 나서야 했다. "관객 여러분, 저는 이 작품의 연출잡니다. 지금 불이 꺼진 것은 공연 조명이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대학로 전체가 정전이 돼서 사실상 조명이 불가능합니다. 초대권을 드릴 테니 나중에 관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비상용 형광등을 켜고라도 계속 보시겠습니까?"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 응답이 돌아왔다. "그냥 볼래요!"
 
그날 단조로운 형광등 아래서 이어진 후반부 공연은 절박해진 배우들이 혼신을 다해 연기해준 덕분에 최상의 공연이 되고 말았다. 세 번째 반전!

최종률장로 / 연극연출가ㆍ배우ㆍ한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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