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수집은 곧 신앙,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

[ 아름다운세상 ] 전 세계 돌며 한국학 희귀자료 수집하는 전 조달청장 강정훈장로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2년 05월 21일(월) 10:56
   
▲ 전시회가 열리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앞에선 강정훈장로. 보물찾기 하듯 30여 년간 전 세계 1백여 개의 헌책방,미술관에서 희귀자료들을 수집해왔다.

'벽안의 외국인이 왜 이곳에 잠들어 있을까.'
 
1964년,22살의 청년 강정훈은 1시간을 걸어 도착한 양화진에서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황량한 묘지에 서서 이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준 선교사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청년의 가슴에는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것이 생겼고 장년을 지나 칠순을 맞이하기까지 미친듯이 그들의 기록을 찾아 헤맸다. 지난해 개화기 외국출판 도서 등 한국학 관련 자료 6백75점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한 강정훈장로(미암교회ㆍ전 조달청장)의 이야기다.
 
지난 17일 '서양인이 본 근대전환기의 한국ㆍ한국인(영천 강정훈 기증문고를 중심으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강 장로를 만났다. 그는 헌책 수집의 달인이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30여 년간 전세계 1백여 개의 헌책방,미술관으로 발품을 판 결과다. 이렇게 지독한 책병을 앓는 것을 가리켜 혹자는 열정이라 누군가는 집착이라 했지만 그 자신에게 수집은 곧 신앙이었다. 해외 출장 때마다 헌책방을 들락거리다가 1980년대 중반 뉴욕 총영사관 영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수집에 뛰어들었다.
 
"원망도 많이 들었죠. 외국에 다녀와도 남들처럼 애들 선물 한 번 사오지 못했으니까. 며칠 동안을 새로운 '헌책'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집사람도 기가 막혔을 겁니다. 사실 희귀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나에게 믿음의 표현이었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혹시라도 헌책이 삭을까 일부러 추운 방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곤 했다는 강정훈장로의 말이다.
 
그렇게 반평생에 걸쳐 모은,1남 2녀의 자식들만큼이나 애지중지 아꼈다는 자료를 어떻게 기증하게 된 것일까. "나이 70이면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인데 이제 다 내려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품을 떠나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시집을 보내도 괜찮겠다 싶었죠."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깐깐하게 조건을 따져본 강 장로는 개화기 문헌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중매는 절친한 벗인 유영렬교수(숭실대 사학과 명예)가 서줬고 자녀들은 "지금까지 아빠가 한 결정 중에 최고"라며 박수를 보내줬다. "사실은 자녀 중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 기증 여부를 상의하지 않았었다"고 귀띔한 강 장로는 "평생 일에 미치고 책 수집에 빠져 사느라 아내에게 미안한게 많다"며 부인 박안자권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 존 로스가 지은 'HISTORY OF CORE(한국의 역사)'에 수록된 한국인 모습. 한국인 고급 관리 부부와 무관 부부 복장.

기증 전 헌책들을 보관했던 서재를 그는 '매켄지홀'이라 불렀다. 뉴욕의 MOBIA(The Museum of Biblical Art)처럼 '매켄지박물관'을 세우는 것을 꿈꾸기도 했지만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의 일이 아니었다. 여러 기증문헌들 중에서 가장 먼저 '한 알의 밀(A corn of wheat)' 앞에 선 강정훈장로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가 없다"며 캐나다 출신의 매켄지(W.J. Mckenzie)선교사와 이 책의 저자 매컬리(E.A. McCully)선교사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강 장로는 1989년 뉴욕의 한 고서점에서 당시 7불에 이 책을 구입하면서 처음 이들을 알게 됐고 두 사람의 한국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한 알의 밀'은 소래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매켄지가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 후 약혼자였던 매컬리가 그의 흔적을 좇아 쓴 책이다. 매컬리 역시 평생을 독신으로 약혼자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강 장로는 "매켄지선교사는 시골 오두막집에 살면서 한국인과 똑같은 생활을 했다. 하지만 말라리아,일사병으로 인한 정신착란증세 때문에 자살이라는 비극에 이르게 됐다"며 "그가 잊혀진 선교사로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이 인간적으로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이라고 했다.
 
양화진에 잠들어있는 선교사들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면서 한국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선교사들의 삶은 비단 교회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강 장로가 수집하고 기증한 개화기 문헌들에는 기독교가 한국 근대화에 끼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근거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가 우리 민족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사회에 본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장로된지 22년인데 교회 다니면서도 제일 두려운게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돌아봤다.
 
6백75점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일까. 강 장로는 "돈으로 환산하면 기증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책병(病)은 완치된 것일까. 뉴욕,보스톤,런던,암스테르담 등 그는 여전히 세계 유명 고서점의 회원이고 가끔씩 헌책 카탈로그를 받아보기도 한다. 언더우드선교사의 초기 사진 자료집,한국의 놀이 문화 관련 문헌 등 위시 리스트(Wish list: 희망구매 목록)도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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