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총회장 김응순 목사, 제32회 총회장 배은희 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5월 15일(화) 15:09

 제31회 총회장 김응순 목사
 
김응순(金應珣, 1891-1958)목사는 황해도 장연 소래에서에서 출생하였다. 자생적 교회인 소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상경하여 경성보통학교 6년제를 졸업을 하였다. 그는 1927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제21회)을 하고 그 해 가을 소래교회의 청빙을 받고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6년 해주 제일교회에서 시무 중 황해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시 신사참배 결의에 동참하였으며, 이 무렵 친일단체인 친일 기독교단체인 평양기독교회에 가입하고 김응순, 장운경 목사 등과 함께 일본을 성지로 알고 교토에 있는 해이안신궁(平安神宮), 나라에 있는 가시하라신궁(柵原神宮),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이세신궁(伊勢神宮) 등 여러 신궁을 다니면서 신사참배를 하고 귀국한 일이 있었다.
 
1942년 10월 16일부터 20일 까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31회 총회가 개회되었을 때에 목사, 장로 총대 각기 69명이 모였으며, 이때 개회선언을 했던 최지화(鐵原志化)총회장의 임석 한 가운데서 서기 조승제(趙村昇濟)목사의 인도로 국민의례 예식을 거행하고 이어서 부회장 전필순(平康米洲)인도하에 필승기원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참으로 김응순 목사는 불행 한 시대를 만났다. 황해노회장으로 재임 시 창씨개명을 하여 아라모리(新森一雄)목사라 불렀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3년 5월에 해산을 하고 1943년 일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발족할 때 교단본부의 대표는 통리로서 채필근(창씨개명은 佐川弼近)목사, 부총리는 김응순 목사가 맡았다. 인사위원으로 활동도 하였다. 
 
해방이 되었을 때 북한에서는 강양욱 목사가 이끈 조선기독교연맹 조직에 가담하여 부 총회장까지 역임을 하는 등 북한 공산체제에 적극 협력하는 등 그의 생애에 있어서 두 번씩이나 변절하는 기록을 안고 다니게 됐다. 그러나 1950년 6. 25 한국전쟁으로 월남하여 1952년에는 인천으로 피난하여 보합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다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 놓고 보합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제32회 총회장 배은희 목사
 
1943년 5월 7일 일제의 종교정책에 의해  총회는 해산되고 새로운 일본기독교장로교단이 출발하자 채필근(蔡弼近)목사가 초대 통리(교단장)로 선임됐다. 다시 1945년 7월 7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창설하고 초대 통리는 김관식(金觀植)목사가 선임됐다. 그러나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자 일본기독교 조선교단도 해산되는 일을 만났다. 배은희 목사는 곧 전주 서문교회에 부임하여 남부 총회를 재건해야 한다면서 모든 교구를 노회로 개편하고 1946년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에 모여 제32회 총회를 개회하고 총회장에 배은희(裵恩喜, 1888-1966)목사를 선출하였다. 배은희 목사는 경북 달성 출신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5년의 과정을 이수 했던 배은희는 1920년(13회)졸업을 하였다. 원래 배은희 전도사는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3. 1운동이 일어 날 때 가담하여 옥고를 치룬 일이 있었다.
 
배은희 전도사가 호남의 모교회인 전주 서문교회에 부흥사경회가 인연이 되어 1921년 전주 서문교회 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그는 교회 내에 유치원과 무산아동(無産兒童)을 위한 야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중일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를 하였다. 이때 배은희 목사는 일본 고등형사로부터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불량목사로 취급을 받았으며, 이 일로 결국 전주 서문교회에서 쫓겨나가야 하는 환경에 놓이고 말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해방을 맞이하자 전북도민들의 요청에 의해 치안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를 받았다. 배은희 목사는 해방 전국이 어수선 하자 일본인들에게 보복을 할까 보아 그들이 무사히 귀국 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총회장을 역임한 후 목사로서 대한민국 초대 고시위원장직을 맡아 수고도 하였다. 1951년 고향 경북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정 활동도하였다. 자유당이 왕성 할 국민부장을 거쳐서 경상남도 자유당 지구장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자유당을 이끌고 갔던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 활동을 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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