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19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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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5월 10일(목) 10:15

월-예수님의 효행을 배우자
본문: 에베소서 6:1-3?
찬송가: 424장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내신 효자중의 효자였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서 효자의 본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효행을 배우자. 자식농사와 부모공경은 하나님 앞에 연결되므로 우리가 이 부분에 실패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오늘의 부모는 스스로가 효도받기를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다.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자식은 태중에서 다섯 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경제성장으로 잘 살게 된 것만큼 효도사상이 떨어지게 되었고 윤리도덕이 무너지고 있다.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최후의 선이다. 효의 모델이 되신 예수님은 어떻게 효도했는가?
 
예수님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고 살진 음식을 주면 소화를 못하신다. 왜 하나님이 자식을 기업으로 주셨는가? 자식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기 위해 주셨다. 어떻게 하면 부모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는가? 부모를 경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중하게 여겨야한다.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했다(신27:16).
 
자녀가 의롭고 깨끗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 부모는 기뻐한다. 사회에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교도소를 들락거리면 부모의 마음은 무너진다. 자기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자녀를 보면 기뻐한다. 자녀가 세상에서 쓸모가 있을 때 기뻐한다. 직장도 없고 시집도,장가도 못가고 나이 들어도 독립도 못하고 부모 그늘 밑에 있으면 부모의 가슴은 상하고 찢긴다. 자녀가 건강하고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 그 뜻대로 살아갈 때 부모는 기쁘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여 "이는 내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기쁨덩어리였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부모님께 순종하는 효자였다.
 
"예수님의 나이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순종하여 받드셨더라(눅2:51)."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효도의 극치를 이루는 두 산이 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모리아산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언덕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소중한 말씀이다. 늙고 무식한 부모라 할지라도 경하게 여기지 말고 중하게 여기는 자식들이 되자.
 
정철의 시조 한 편을 떠 올려본다. 어버이 살아 신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부모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믿었던 고르반의 신앙을 회개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부모님을 기쁘게 하며 순종하며 살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덕순목사 / 청화교회

 


 

화-부모를 공경하라
본문: 엡 6:1-3
찬송가: 579장
 
사도바울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부모에 대한 공경을 명하고 있거니와,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 중 제 5계명에 속해 있기도 하다. 모세는 부모공경이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로 규정하였다(레 19:1-3).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장에서 부모와 자녀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1절)

'주 안에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때 주께 순종하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순종의 한계를 설정해 놓은 것이다. 순종이 실천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2절에 나오는 '공경하다'는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하다라는 의미로 우리의 마음의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다.
 
즉 자녀로서 부모를 대하되,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부모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2절)
 
모세의 십계명 중 제 2계명을 보면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제 2계명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약속이라고 한다면 제 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하는 약속은 제 2계명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은혜'의 예이며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에 따라서도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 잘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이 잘되게 하시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셋째,"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3절)
 
'네가 잘되고'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질적인 축복을 말함이며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한 것은 양적인 축복이다. 땅이란 약속의 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는 사람이 장차 거할 곳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킬 뿐 아니라,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 곳도 포함한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장수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부모님 공경의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변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요 이를 잘 지켜 행할 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공경,부모님 공경 잘 하여 영생과,인생의 삶이 잘되는 복 있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양명안목사 / 아산교회

 


 

수-복된 명령,정복하라 다스리라
본문: 창 1:25-28
찬송가 : 28장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맨 처음 하신 말씀은 축복의 명령이었다(창 1:28).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축복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은혜 속에서 살아 갈 때 인간은 가장 강할 수 있고,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하여 그 복을 받아 누리는 길을 보여 주시며 그 자리로 부르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진노하시고 징계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의 중심은 사랑이요 축복이었다. 회개하게 하여 구원하시고 복주시기 위하심이었다.
 
이스라엘이 가장 강하고 세상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때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때였다. 출애굽 후 가나안을 향해 광야 길로 나아갈 때 이스라엘의 실체는 오합지졸이었다. 군사훈련도 전쟁무기도 비축식량도 없었다. 이렇다 할 진행 계획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에게 두려운 존재요 간담을 녹였다(수 2:9).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오직 하나 저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축복된 관계로 이끌어 가는 지도자 모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의 일생도 그렇다. 졸지에 노예가 되어 버렸는데도,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형통한 자가 되었다(창 39:2, 23).
 
그렇다.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복 주시는 은혜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물질의 풍요로움에서,권세에서,명예와 육신적인 편안함에서. 그것들은 하나님이 누리고 나누라고 허락하신 축복인데 사람들은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성공을 논하려고 한다. 속지 말자. 착각하지 말자.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 말은 하나님과 가장 닮았을 때,하나님과 가장 친밀할 때가 가장 아름답고 인간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세상 어디에서 갈고 닦을 수 있을까?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배 기도 말씀 찬양에서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럴 때 여러분은 가장 강건하고 충만한 삶, 복된 인생을 열어 가게 될 것이다.
 
왜 사람들이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을까? 정복하고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된 명령은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다. 지금의 세상은 정복하느냐 아니면 정복당하느냐이다. 다스리지 않는 자는 다스림 받으며 살아간다. 내 속에 있는 죄된 옛 성품을 정복해야 한다.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을 다스리고 환경을 다스리고 물질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의 복된 명령대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가 되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인생을 가장 복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축복의 길을 주셨는데 엉뚱한 길에서 수고하지 않게 하시고 정복하고 다스림 속에서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재규목사 / 새청교회

 


 

목-어린이 예찬
본문: 마가복음 10:14
찬송가: 561장
 
오래 전에는 어린이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다.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면 시끄럽다는 핀잔이 심했고 "아이들이 뭐 알아"라며 무시했다. 심지어는 3대 묘(墓)가 묵어도 아이 우는 소리는 듣기 싫다 할 정도였다.
 
벧세다 들녘에서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도 '여자와 아이 외에' 먹은 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다 하였으니 어린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천국의 주인은 누굴까?
 
예수님으로부터 안수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의 속성상 시끄럽게 되자 제자들이 이들을 꾸짖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고 말씀하셨다.
 
또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고 하셨고 "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하셨으며 "누구든지 이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야 된다(마18:16)"고 하시기까지 어린이를 사랑해 주셨고 지켜주셨다.
 
평가 절하된 어린이를 천국의 주인으로 천국의 백성 되는 자격기준으로 격상시키신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이 나온다. 길가,흙이 얕은 돌밭,가시떨기,좋은 땅이다. 이 토양들을 비유해서 세대별로 분류한다면 길가는 노년,돌밭은 장년,가시떨기는 청년,좋은 땅은 아이들의 유년기라 볼 수 있다. 좋은 땅 외에는 뿌린 씨앗이 하나같이 결실되지 않았다. 다만 옥토에 뿌린 씨앗만이 백배,육십배,삼십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 노년이나,장년,청년에게는 전도해도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하지만 어린이에게 복음을 전하면 확률이 높다는 증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린이야 말로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어린이 전도는 지상(地上)교회의 지상(至上)과제이다.
 
"늙어서 얻은 지식 모래위에 쓰여 진 글씨이고,어려서 얻은 지식 반석위에 새겨진 글씨이다." 이스라엘 건국의 지도자 벤구리온(Ben Gurion)의 말이다. 어린이야말로 주님의 백성 되게 하는 복음의 옥토임을 아무리 역설해도 다함이 없다.
 
어린이들은 진솔의 대명사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주님의 기도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박하고 진솔한 갈릴리 어부들에게 전파된 것을 우회적으로 전해 주는 말씀이다.
 
진솔이란 꾸밈이 없고 거짓 없는 진실함이다. 어린이는 진솔함의 대명사이다. 때로는 개구쟁이들의 천진난만한 행동이 귀찮을 때도 있지만 이들의 진솔함은 한없이 예찬하고 한결같이 극찬해도 아깝지 않다.
 
<오늘의 기도 >
어린이를 사랑해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의 어린이는 사회적인 환경과 잘못된 교육으로 인하여 고난 받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어려움에 처하지 않고 맑고 싱싱하고 건강하게 자라도록 보호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재훈목사 / 서부중앙교회

 


 

금-어머니의 손맛
본문: 요한복음 21:9
찬송가: 579장
 
햄버거와 피자에 입맛을 빼앗긴 아이가 산나물 냄새를 맡으며 "매울 것 같다","이런 풀뿌리 먹어도 되냐?"고 계속해서 질문을 하며 고개를 젓지만,필자에게는 여전히 어머니의 맛이자 고향의 냄새다.
 
얼마 전 아내가 수퍼마켓에서 구입한 나물을 가지고 몇 번 요리를 시도했으나 어머니께서 해 주시던 그 산나물 맛이 아니었다. 서양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요리하는 사람의 손맛'이라는 개념을 아무리 말해주어도 잘 모를 것이다. 그들은 레시피(recipe)만 있으면 누구나 같은 음식 맛을 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 음식문화 속에는 '손맛'이라는 것이 있다. 음식을 먹을 사람을 생각하며 세심하게 배려하여 음식을 만드는 것을 손맛,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의 손맛도 대단하다. 예수님은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 제자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찾아가셔서 하신 일이 바로 숯불에 고기를 올려놓고,빵을 준비하신 일이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추운 바닷가에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지쳐있는 ,그것도 당신을 부인하고 떠난 제자들을 위하여 음식을 손수 준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준비하신 음식은 첫째로,물고기이다.
 
물고기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무엇이 생각났을까? 물고기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주님을 처음 따르게 된 그 때가 기억났을 것이다.
 
예수님은 허탕을 치고 돌아온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고 말씀하셨고,그 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두번째로 떡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할 때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 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끝으로,숯불을 보면서 베드로는 계집아이 앞에서 허무하게도 3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저주까지 하던 일이 기억났을 것이다(요18:18).
 
이처럼 주님이 준비해 놓은 식탁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과거가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주님이 베드로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고자 하신 일이 아니다. 주님은 어머님처럼 낙심한 자를 섬세하게 살펴 회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손맛을 신나서 이야기하듯,예수님에 대해서도 신나게 이야기 나누시기를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정을 세심히 살피시고,섬세한 손길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기쁘고 감사한 순간,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가족 모두가 날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기억하고,감사하며 기뻐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한호목사 / 춘천동부교회

 


 

토-표현되는 사랑.
본문 : 요한일서 4:7-8
찬송 : 220장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말만 가지고는 안된다. 디모데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믿음을 배반한 자요,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딤전 5:8)"고 책망했다. 

요한일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기둥이 있다면 믿음과 사랑이다. 믿음은 삶의 기초요 사랑은 삶의 열매며,동시에 믿음의 증거다. 그러므로 사랑은 믿음의 완성이다.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행함이어야 한다. 요한일서의 배경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족관계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은 무엇일까?
 
학문 세계에서 '존재 인지 자극'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특정한 행동이 누군가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는 뜻이다. 사랑의 자극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스트로크(stroke): 쓰다듬다,어루만지다'이다. 일테면 어깨에 손을 얹는 것,미소를 짓는 것,따뜻하고 우호적인 얼굴 표정 등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그의 사랑은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어떤 이익을 기대하고 사랑을 베푸신 것도 아니었고,끝없이 자신을 주고 베푸는 헌신 그 자체였다. 그저 주기만 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이고,목숨까지도 아낌없이 주신 희생적인 사랑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온전한 헌신적 사랑의 마음과 실천을 가족 간에 서로 베풀면서 가정을 세워나가야 한다.
 
예전에 필리핀에서 그들의 교통수단인 찌프니를 탔는데 차 안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네 아이의 입에 약을 털어 넣기 전에,네 아이를 껴안아라. 바로 오늘." 그렇다. 우리의 자녀들을 자주 포옹해 주어야 한다.  
 
영성훈련의 한 과정에 '아브라죠' 혹은 '허깅'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서로를 포옹하는 것이다. 포옹하며 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안기만 하면 은혜를 충만히 받고 눈물을 펑펑 흘린다. 그냥 그 포옹에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표현되어야 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만이 아니라, 배우자 간에도 자주 사랑의 표현을 해야 한다. 아주 거룩하다고 하는 청교도들조차도 "감상적인 애정 표현을 개발하며 진정한 사랑은 표현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것을 '나타난 사랑'이라고 한다.
 
어느 보험 회사의 조사에 의하면,아내가 아침에 “다녀 오세요”하고 키스해 주면 남편의 사고율이 감소되고,5년 이상 더 산다고 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온 마음을 다하여 하라. 사랑은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자신의 온 생애를 다 바쳐서 하는 것이다. 사랑의 힘은 세상 그 어떤 힘도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세상을 밝게 해준다.
 
<오늘의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무런 조건 없이 독생자까지 보내주시는 그 크신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에 부족함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영준목사 / 김포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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