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총회장 곽진근 목사(1940-1941), 제30회 총회장 최지화 목사(1941-1942)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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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5월 08일(화) 13:46
 29. 제29회 총회장 곽진근 목사(1940-1941)
 
곽진근(郭眞根, 1897-1941) 목사는 전북 김제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 군산 선교부 부위렴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접하였다. 한일합병 후 전북지방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인 전주농업학교 입학하여 그곳에서 5년 간 교육을 받은 후 다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1924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자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됐다. 1925년 전북 김제군 금산면에 있는 금산교회와 원평교회 두 교회의 합동으로 청빙을 받고 시무를 하였다. 1937년에는 정읍군 신태인읍교회와 화호교회 두 교회의 합동으로 청빙을 받고 목회를 하였다. 이 무렵 신사참배결의 하자는 안건을 전북노회에 상정했던 일도 있었다. 
 
1940년 9월 평양 창동교회에 모여 제29회 총회가 개회될 때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는 젊은 곽진근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모두 놀라고 말았다. 회의 중 외부 인사로 일본기독교대회 가네이 목사, 일본신학교 무라다 목사, 복음신문사 주필 도가히 가 각각 축사를 하였다. 곽진근 총회장 시 주요한 결의한 사항은 '장로회보'를 발간하는 데 각 교회는 1부씩 의무적으로 구독하는 한 한편 장로회보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과 표어 관리사무와 종교교육부 등의 발전 사업을 위한 신문으로 전환하게 됐다. 이 회의에서 친일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황기 2600년을 기념키 위하여 10월 20일 애국주일로 지키기로 결정을 하고 이를 전국 교회가 지키기로 결의를 하였다.
 
또한 조선예수교장로회 포교관리자(목회자)는 각 노회에 신사참배토록 경고문을 발송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모든 목회자는 창씨개명 한 후 총회에 보고토록 하였다. 이 일로 친일에 앞장섰던 목사들은 앞을 다투어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곽지근 목사는 시대를 잘못 만나 친일적인 인사로 역사로 남게 됐으며, 불행하게도 1941년 총회장이 끝나자 그 해 말 45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30. 제30회 총회장 최지화 목사(1941-1942)
 
최지화(崔志化, ?-1950) 목사는 평안북도 안주에서 출생하였다. 안주 성내교회를 출석하면서  보통학교 과정을 졸업하였다. 그 후 선교사의 권유를 받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1911년 졸업을 하였다. 다시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17년 졸업을 하였다. 1919년 안주읍교회(후에 안주 성내교회를 안주읍교회로 불름)에서 장로로 장립을 받고 안주읍교회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다.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3년간의 수업을 이수하고 1924년에는 안주 중앙교회의 목사청빙을 받고 안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평양노회 연화동교회로 이명 한 후 평양노회 소속으로 총회에서 활동을 하였다. 최지화 목사는 다른 목사와는 좀 달랐다. 그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목사가 되었기에 당시 총회 안에서는 실력 있는 목사로 정평이 났었다. 1941년 11월 제30회 총회가 평양 창동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제30회 총회장으로 최지화 목사가 선임되었다. 11월 22일 오전에는 총회 총대원 전원이 총회장의 인솔에 의해 처음으로 평양신사를 참배를 하고 장대현교회에서 총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최지화 총회장의 사회로 진행하였다. 총회 중에 국방헌금하기로 결의하자 즉석에서 모금된 헌금액수는 230앵 이었다.
 
이미 중일전쟁(지나사변)은 일본 황군들은 동남아를 점령하면서 그 기세가 당당하였다. 이러한 시기를 맞이한 총회는 각 노회로 하여금 '朝鮮長老敎徒愛國機相當數'를 헌납하기로 작정하고 그 헌금은 유아세례자와 실종자를 제외한 교인수 비례로 1인당 1앵 씩 헌금하기로 가결하였다. 최지화 목사는 불행 한 시기에 총회를 맡아 일제 부역에 협력한 인물이 됐으며, 해방 후에는 더 이상 교회에서 목회 할 수가 없어서 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신학교 교수로 봉직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출발하면서 이 두 신학교(평양신학원, 성화신학교)를 통폐합하여 1950년 3월 조선기독교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6. 25 전쟁으로 인하여 이 학교는 7월 15일 폐교되면서 최지화 목사는 숙청을 당하였다.
 
 
김수진목사 / 한국교회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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