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선애교수와의 1년 동거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가득한 옥합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24일(화) 13:47
나보다 신학교 3,4년 선배인 주선애선생이 나와 함께 약 1년 동안 같은 방에서 생활하셨다. 주 선생은 이때 대구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는데 딱히 머무를 숙소가 없는 처지였다. 이때의 주 선생은 열심히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서문교회 사택 문간방에서 둘이 함께 지냈다. 아침에 자그마한 밥솥에 밥을 지으면 주 선생과 내가 딱 절반씩 나누어 먹었다. 점심은 거의 굶었다. 저녁 식사 준비할 시간이 오면 시장으로 갔는데, 이것저것 반찬거리를 사서 장만할 형편이 되지 못해 시장통에서 남들이 버리고 간 김장용 배추 껍질을 주워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 시래기로 국을 끓이거나 혹은 그것을 삶아서 된장에 찍어 먹었다. 고추장, 된장은 이웃에서 얻어 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고생을 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날씨가 쌀쌀해지자 방에 군불을 때야 했다. 그 당시의 난방연료는 아직 구공탄이 생산되기 전이어서 마른 장작을 땠다. 우리는 무엇이든 최대한 아끼고 절약해야 했으므로 냉골을 면할 정도의 난방으로 겨울을 지냈다. 방 안에 있지만 시린 손을 비비고 호호 입김을 불며 일해야 했다. 비록 장작불을 많이 때서 따뜻하게 덥혀진 아랫목이 그리웠지만, 그래도 누워서 잠잘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감사했다. 주선애선생과 나는 생활리듬이 서로 달랐다. 그는 초 저녁 잠이 많았고 나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야행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새벽 2시까지 공부하느라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주로 박창환교수가 강의하시는 헬라어 숙제를 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공부했다. 내가 숙제와 공부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주 선생이 일어날 새벽녘이었다. 자연스럽게 잠을 바꾸어 자게 된 새벽시간이었다. 내가 앉아 있던 책상에 주 선생이 앉아서 공부했고 주 선생이 잤던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고맙게도 나는 그가 밤새 덥혀 놓았던 따뜻한 잠자리에 들어가서 달콤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 무렵에 서문교회 담임 명신홍목사님이 서울로 떠나시고 부목사이신 이성헌목사님이 담임이 되셨다. 이 목사님은 내 동생 연신의 약혼식을 주례하셨다. 그로부터 50년 세월이 흘러 동생 부부가 결혼 50주년 기념식에 이성헌목사님을 모셨다. 이때 이 목사님이 그 시절을 회상하며 회고를 하셨는데 "장차 우리나라의 거물급 여성 지도자가 될 두 여성(주선애, 이연옥)이 그 고생할 적에 내가 잘 도와주지 못했다. 배추 시래기 주워서 간신히 먹고 살아가는 모습을 내가 다 보았는데요… 참 미안하다"고 술회하셨다고 한다.
 
전쟁 통에 대구에서 개교했던 신학교가 1953년 7월 휴전협정과 더불어 서울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나는 신학교의 마지막 학기 수업을 서울에서 들었다. 이 무렵에 교회가 전국적으로 부흥되었다. 교회가 부흥하는 속도에 비해 교역자의 수가 크게 모자랐다. 신학교의 모든 재학생이 교회 일을 맡고 있었기에 주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교역해야 했다. 공부와 목회 둘 가운데서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길 수 없었기에 신학생들은 시간을 쪼개 살아야 했다. 더욱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지방의 교회에서 교역하는 전도사 신학생은 금요일 밤에 기차를 타고 밤새도록 사역지로 달려가야 했다. 그리고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다시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와야 했다. 서울에 도착하면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그런 사정 때문에 마지막 학기에 등록한 학생들은 하루라도 빨리 졸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때의 학사 일정은 1954년 2월에 졸업식을 거행하도록 잡혀 있었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그 학기의 종강인 11월 말에 아예 졸업식을 하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이 사안을 학교 당국에 건의하기 위해 학우회가 모였다. 다수의 의견은 하루 빨리 졸업식을 하자는 것이었다. 종강 이후에 곧바로 겨울방학이 시작되는데 겨울방학을 지내고 내년 2월까지 졸업식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또한 2월에 졸업식만을 위해 지방에서 교통비 들여 서울로 올 필요가 뭐 있겠느냐며 내년까지 기다리지 말자고 제안했다. 이때 내가 손을 들고 말했다. "신학교를 졸업해서 장차 목사가 될 사람들이 이미 정해진 학사일정을 마음대로 조정해 졸업식 날짜를 바꾸자는 발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자 내 발언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몇몇이었고 반대하고 핀잔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은 평소에 공부에만 전념하던 나에게 "참 팔자 좋은 얘기한다"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목회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결국 학우회가 학교와 협의해 학사일정을 변경하기로 하고 졸업식을 종강과 더불어 하기로 했다. 마침내 나는 1953년 11월 27일에 장로회신학교 본과(47기)를 졸업했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졸업생의 수가 본과 28명에 별과 1백20명이었다. 본과 졸업생 가운데서 여학생이 2명이었는데 나와 권태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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