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의 피난 생활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17일(화) 17:13
대구에 도착하니 전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가득했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집 안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의 방마다 최소한 한 가족 이상이 살았고 심지어는 대청마루에도 한두 가족이 지냈다. 마당에는 군데군데 밥 해먹는 간이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대구 시민과 피난민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서 서로 돕고 돌보며 지냈다. 시내의 교회 건물도 모두 피난민을 위해 내어 놓았다. 예배당은 물론이고 유치원실, 당회실 등의 부속건물도 다 외지에서 온 교인과 피난민들의 생활을 위해 내어 놓았다. 피난지 대구에서 개교한 신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대신동에 있는 서문교회 예배당도 신학교 교실로 사용되었다. 신학생들은 교회가 제공한 누추한 거처에서 기숙사처럼 살았다. 밥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신학생들이 다수였다. 매 끼 식권을 내고 식당 밥을 먹었는데 식권 살 돈이 없어 밥 대신 물을 마시며 그냥 굶고 지내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눈이 다 풀어진 학생들이 공부를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을 보다 못해 서문교회와 제일교회가 여러 교회와 단체에서 돈을 모금해 쌀 1백가마를 사들였고 된장, 간장 등도 얻어서 손수레로 실어왔다. 신학생들이 입을 옷은 미국 선교사 단체에서 얻어 왔는데, 주로 미군 군복이었다. 군복은 지독한 땀 냄새로 찌들었고, 또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남학생들은 먹을 것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퉁퉁 부은 얼굴에 이발도 자주 하지 못했으므로 머리가 덥수룩한 몰골이었고 몸에 맞지 않는 미군 군복을 걸쳤으니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서문교회에서 개교한 신학교는 예배당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나는 이 학교에 복학했다. 나와 함께 대구로 온 친구들이 나까지 합해 4명이었는데 한 사람은 일반 대학으로 갔고 나머지 세 사람이 신학교에 다녔다. 예배당에 긴 의자를 놓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모두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하루종일 다리를 폈다 오그렸다를 반복하며 한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면 무릎이 뻐근히 아파 오고 엉덩이도 결리고 허리가 쑤셔 온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발 냄새였다.
 
남학생들의 발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 몸을 자주 씻지 못하기 때문에 발에서 풍겨나는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곁에 앉아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 여학생들은 되도록 강의실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반에 여학생이 여덟 명이었는데 이성은, 권태임, 임종숙 등이었다. 서문교회 담임 명신홍목사님이 신학교에서 가르치셨다. 서울 남산의 장로회신학교에서도 이 분이 예배학을 가르치셨는데 나는 이분에게 '강도학'을 배웠다. 그 학기의 기말 시험에서 내가 만점인 1백점을 받았다. 우수한 성적을 받아서 그런지 명 목사님이 나를 아주 잘 기억하고 계셨다. 목사님이 나를 당장에 서문교회 교육전도사로 채용하고자 하셨다. 나에게 성경공부와 고등부ㆍ청년부 지도를 맡겨 주셨다.
 
지금까지는 박복달이라는 여전도사가 이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했고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알려졌는데 이분이 최근 소위 '고려파'(고려신학교 측)로 떠나가면서 서문교회를 사임했다. 그냥 말없이 떠난 것이 아니라 "명신홍목사에게서 성령이 떠났다"는 물의를 일으키고 떠나 버렸다. 그 당시 대구의 교계는 장로교회의 내부 싸움과 교단 분열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에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렇게 소위 고려파의 바람이 드세게 몰아치는 교회 환경 속에서 나는 서문교회 교육전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교회는 나에게 교회 사택에 달려있는 문간방을 제공했다. 그러면서 나는 주일에는 고등부와 대학부를 지도했다. 이때 내가 지도한 학생들 가운데는 대전에서 교역했던 강성두목사가 있었다. 방학 때에는 나이 드신 여전도사님들을 따라 교인 가정을 심방했다. 교인들 모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고통을 겪으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이런 형편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풋풋한 정감이 마치 마르지 않는 옹달샘처럼 흘러나왔다. 한번은 어느 전도사님이 내게 찾아와 중매를 서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황해도 출신에 평양의 신학교를 졸업하셨으며 사모님과 어린 아기를 데리고 대구로 피난 오셨다. 본래 부잣집 자제분인데 피난살이 하느라 고생을 심하게 겪고 있었다.
 
내가 그분과 동향이어서 그런지 그분은 나를 가까운 사이라고 여기며 적극 나서서 중매하시려했다. "이 선생 아무래도 적령기에 시집 가야 하지 않겠나?" 나는 빙긋 웃으며 여쭈어 보았다. "어떤 사람인데요?" 그러자 "나보다 나이가 조금 위인데 지금 신학교에서 나와 함께 공부하고 있는 선배"라고 했다. 나의 대답은 분명했다. "난 신학생하고는 절대로 결혼 안 합니다" 팅팅 부은 얼굴에 땀 냄새로 찌들은 미군 군복 하나 걸치고 다니는 거지꼴 신학생과 어떻게 결혼한단 말인가? 나는 덧붙여서 말했다. "전도사님, 저는 신학교 마치고 미국 유학 가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 결혼할지 말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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