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의 열정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장로의 빈 방 이야기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09일(월) 10:53
당시 필자는 가톨릭 재단인 서울 계성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정규과목은 미술이었지만 특별활동 지도교사로 미술반과 연극반을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해마다 미술작품 전시회와 연극반 공연은 물론이고 교사극회까지 만들어 제자들과 동료교사들을 관객으로 공연을 하는가 하면 개신교 학생들의 자발적인 기도모임의 지도교사로, 또 그들과 함께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극과 찬양으로 공연활동을 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가톨릭학교에서 개신교활동을 하는 데는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면 모든 종교서클의 지도는 수녀들만 가능하다고 원칙 같은 것이었다. 개신교 학생들의 영성지도를 수녀님이 하다보니 성경해석이나 기도문, 용어문제, 성모 마리아 숭배문제 등에서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강당의 준비실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은밀하게 기도회를 가져야 했다. 학생들은 그 곳을 카타콤이라 불렀다.
 
방학기간 마저도 연극연습과 미술반 야외스케치 등으로 쉴 틈 없이 보냈고 거기다가 교회 섬기는 일, 극장 '증언'사역 대학로 극단들의 초빙에 따른 객원 연출 작업까지 합하면 나의 30대는 가히 열정의 질풍노도시대였다. 미술과목이 진도에 구애를 받지 않는 덕분에 수업내용을 창의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는데 때로는 화가 이야기, 영화 이야기, 나의 청소년 시절 이야기 등을 일인극 연기하듯이 강단과 교실 앞뒤 문을 세트처럼 드나들면서 실감나게 들려주면 금세 소문이 퍼지면서 교실마다 난리가 났다.
 
해마다 고난주간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칠판에 도해해 가며 복음을 전했다. 가톨릭 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에 관해 얘기를 하는 것이 크게 눈치 보일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책 잡히지 않기 위해서 학교와 재단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궂은 일도 마다 않고 최선을 다했다. 제자들을 여럿 동숭교회로 인도했는데 그 중에는 교회에서 짝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된 경우도 둘이나 있었다.
 
1981년 봄 '루터' 공연을 끝낸 후 그해 성탄절을 지난 글에서 다룬 것처럼 '빈 방' 첫 공연으로 감격을 맛보았고 이듬해인 1982년에는 '루터'의 재공연을 가졌다. 그런데 여기서 학교재단과 갈등의 소지를 만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단 루터라는 인물 자체가 구교의 입장에서는 달가울리 없었을 것이고 둘째는 마땅한 극장이 없어서 수소문한 끝에 겨우 대관한 곳이 하필이면 계성여고에서 가까운 명동 코리아극장이었다는 점이다. 재단 관계자들의 눈에는 한 개신교 교사가 가톨릭의 기피인물인 루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을 학교 인근에서 공연한다는 사실이 다분히 의도적인 도발로 보였을 터이다. 실상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공연을 마치고 난 후 본의아니게도 불편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물론 재단으로부터 직접적인 항의나 경고를 받은 일은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위축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기막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성여고의 기억들이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성여고는 내게 가르치는 보람과 행복, 꿈 많은 소녀들과 신부님들과 수녀님들과의 뜻깊은 대화를 경험하게 해 준 소중한 터전이었다.
 
계성여고 종마루 언덕에서의 십여년 교직생활은 열정과 행복으로 결산할 수 있는 내 인생의 항금기였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그 30대의 끝자락 즈음에 한 여인, 생의 반려자를 만났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최종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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