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피난생활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가득한 옥합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09일(월) 10:44
우리는 겁이 나고 무서워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냥 가만히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나섰다. 조순덕을 잡아가는 인민군 일행의 뒤를 따라가면서 "이 사람은 분명 우리 조카 며느리요. 우리 조카가 함경도에서 결혼해서 데려온 사람인데, 이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이 잘못되었으면 차라리 날 총살하시오. 난 죽어도 좋소. 이 젊은 사람을 끌고 가면 어떡합니까?"하고 하소연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로잡힌 조순덕은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옥수수를 한 솥 가득히 삶아서 머리에 이고 인민군 사무실(초소)로 가져갔다. 할머니는 인민군들 앞에서 조순덕을 위해 용감하게 행동했다. 할머니의 용기있는 변론 덕택에 조순덕은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마을에서 피난살이 하면서 나는 성격이 괄괄한 조순덕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우리는 여름철 내내 삼시세끼를 오직 보리밥만 먹었다. 쌀밥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도무지 보리밥에 적응하지 못했다. 보리밥이 내 뱃속에 들어오기만 하면 배가 살살 아프다가 설사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먹거리에는 아예 보리밥이 없어서 내가 성인이 되도록 보리밥은 구경도 못했으니 아무리 전쟁 중 궁핍한 상황이라도 그 밥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보리밥 한 술만 먹어도 배가 아픈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방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그런 나를 향해 조순덕이 입에서 독설을 뱉었다. "저런 인간은 이북에다 탁 쳐박아두고 왔어야 했는데 저거 사람 구실도 못하는 것을 데리고 왔다"고 야단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피난을 떠나올 때 비누 한 상자를 세 등분으로 나눠서 각자 머리에 이고 왔다. 조순덕의 고향지기가 서울에 와서 비누공장을 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조순덕에게 "어디 피난 가더라도 식량을 바꿔 먹을 게 좀 있어야 한다"며 비누 한 상자를 내준 것이다. 그렇게 받아온 비누인데 조순덕이 그것을 머리에 이고 근처 여러 동네를 다니며 쌀과 맞바꾸었다. 그렇게 얻어온 쌀로 나는 굶주림을 면할 수가 있었다. 조순덕은 나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북한을 떠나오는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6ㆍ25 전쟁의 난리를 피해 시골에서 숨어 지내는 기간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눴다. 우리는 마치 골목친구처럼 툭하면 티격태격 잘 싸웠다. 싸우면서 친해졌고 그러면서 둘도 없는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9월 하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까지 그 마을에서 지냈다. 9월 15일경부터 유엔군이 살포한 삐라가 마을 근처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내용은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마을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날부터 우리는 낮에 산에 올라가서 지내며 기도에 힘썼다. 조순덕 전도사는 역시 기도대장이었고, 우리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함께 금식기도를 드렸다. 나는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나니 기진맥진해져서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순덕은 전혀 동요 없이 계속 금식기도를 드렸다. 우리는 밥 먹고 기도드리고, 그녀는 금심기도를 한 주일, 보름 동안이나 이어갔다. 우리는 하루 종일 기도와 성경읽기만 했다. 드디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서울을 향해 진격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 우리는 환호 속에서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내고 있는 집 주인 할머니의 아들 둘이 모두 다 국군으로 입대했으므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할머니를 총살시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인민군이 후퇴하기 3일 전쯤 할머니를 데려갔다. 그러자 할머니는 "내 아들 둘이 국군에 입대해서 전쟁에 참여했는데 십중팔구 전투하다가 전사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나도 이제 더 이상 살 마음이 없고 더욱이 예수 믿다 저것들 손에 죽으니까 괜찮다."라고 말씀하시며 끌려갔다. 그 말에 너무 기가 막힌 우리는 울고 불면서 할머니의 무사한 귀가를 위해 기도했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날이 어두워지는 무렵에 할머니가 집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우리는 반가워서 마당으로 뛰쳐나가 할머니를 맞이했다. 할머니는 "당신네도 부모가 있을 것 아니냐. 내 아들 둘은 국군에 입대했어. 그래, 나는 죽어도 좋으니 당신들 마음대로 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민군들이 할머니를 하루 종일 잡아 놓고 있다 저녁 무렵에 "다 죽어가는 늙은이 그냥 놓아주자"며 풀어 줬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다음 계속 북진했다. 신학교의 소식이 들려왔는데 대구에서 학교가 개교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구로 가서 신학을 계속하기로 했다. 전쟁 중이어서 기차든 버스든 모든 교통수단이 끊어지고 마비됐는데, 나는 천신만고 끝에 대구로 갔다. 그런데 1951년 4월, 1ㆍ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온 동생 연신을 대구에서 기적적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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