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총회장 남궁혁 목사, 제22회 총회장 장홍범 목사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3월 26일(월) 15:01
제21회 총회장 남궁혁 목사(1932-1933)
 
남궁혁(南宮赫, 1881-1950)목사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상경하여 배재학당에서 고등과 과정을 졸업과 동시에 인천세관에 취직을 하였다. 다시 1903년 목포세관에 발령을 받고 근무를 하였다. 때마침 목포에서 변요한(J. F. Preston) 선교사를 만나 목포양동교회에 출석하다가 목포 세관원 자리를 포기하고 목포영흥학교 영어교사로 취직 하였다. 남궁혁은 숭일학교 학감으로 근무 하였다. 이때 그는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에 출석하여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후 남궁혁 장로는 신학교 모든 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장학생으로 1922년 4월 20일 도미하여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 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신약학을 이수하고 다시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5년에 귀국 하였다. 귀국했던 그는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한국인으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동안 미국 선교사 교수들에게 수업을 받았던 신학생들은 한국인 교수로부터 수업을 받았을 때 그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1932년 9월 9일 평양 창동교회에서 제21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남궁혁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임됐다.  
 
그가 총회장으로 선임된 후 9월 14일 토마스 순교자사업위원회에서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당'을 헌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1938년 9월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4개 선교부에서 함께 운영했던 장로회신학교를 폐쇄하였으며 남궁혁은 가족을 이끌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임정요원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곧 귀국하여 미군정청 관제국장직을 잠시 맡아 일을 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 적산 중 일본 천리교 경성본부와 조선본부를 각각 접수하여 조선신학교에서 사용 할 수 있도록 배려 하였다. 그후 조선기독교연합회(KNCC) 1948년 총무직을 맡아 수고 하였다. 그러나 6ㆍ25 전쟁을 만나 납북되었으며, 그의 아내 김함라 권사는 서울 연동교회에 출석하다가 그도 생을 마감하였다.
 
 
제22회 총회장 장홍범 목사(1933-1934)
 
장홍범(1878-1950) 목사는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였으며, 청년시절에 친구의 권유로 안악읍교회에서 실시하는 부흥회에 출석을 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교인이 됐다. 1909년 안악읍사범강습소를 이수하고 안악읍교회에서 운영하는 안악보통소학교에서 교사로 봉직 하였다. 장홍범은 1913년 3월에 안악보통소학교를 사임하고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하였다. 1918년 6월 신학교를 졸업(11회)하고 그 해 9월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안악군 용문면 동창교회에 부임 하였다. 1921년 재령군 모동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황해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24년 조선주일학교 연합회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면서 어린이 교육에 2년 간 많은 투자를 하였다. 이러한 일 때문에 1932년 9월 제21회 총회에서 종교교육부 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장홍범 목사는 1933년 9월 제22회 평안북도 선천 남부교회에서는 모이는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새로 선출된 총회장 장홍범 목사는 의장으로서 회의를 진행 할 때 각부에서 상정된 헌의들이 기각되는 일이 많았다. 세례교인 1천5백명 당 목사 장로 총대를 각 1인씩 파송하자는 안이 부결됐다.
 
특별히 함남노회를 거쳐서 헌의되었던 여성 장로를 안수하자는 안이 정치부에서 부결되기도 하였으며, 이 일은 한남노회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노회로 상정되었던 안이었지만 결국 남성중심의 교회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이 일을 두고 장홍범 목사는 평생을 두고 후회를 했다고 한다. 제22회 총회시 곡조 찬송가를 발행하기로 결의 한 후 2년간의 작업을 끝내고 1935년 총회 종교교육부에서 신편 찬송가를 발행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938년에는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를 앞두고 일제 고등계 형사에 의해 김선두, 강병주 목사 등과 함께 구금됐던 일도 있었다. 총회 해산으로 고향 안악으로 돌아갔지만 그곳에서 목회하다가 6ㆍ25 한국전쟁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김수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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