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9~24일

[ 가정예배 ]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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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3월 14일(수) 14:08

월-영원과 시간
본문: 시편 90:1-6
찬송가: 312장
 
스위스 라브리의 창시자인 프란시스 쉐이퍼는 이런 말을 했다. "우주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질서와 이성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선한 우주를 창조하셨다. 이 우주는 원래 말씀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이상,이 우주 또한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우주는 하나님의 품성을 바로 말해 주고 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우주가 하나님의 품성을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를 보면 그 무한 광대함과 그 질서정연함과 치밀함에 놀란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무한 광대하심과 영원하심을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주를 통해서도 깨닫게 된다. 모세는 바로 그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인간의 처절한 한계를 깨달았다. 그래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하고 우리 인간의 시간은 유한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풀의 꽃과 같다. 잠시 피었다가 시들어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부귀도 영화도 권세도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사모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에 편입되고 참여하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견고하게 서게 된다.
 
다음은 잉글랜드 체스터 교회당의 시계에 걸린 문구이다. "울고 웃던 어린 시절 시간은 기어갔고,활기찼던 청소년 시절 시간은 걸어갔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시간은 뛰어갔고, 늙어갔을 때 시간은 날아갔습니다. 나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다 가버렸음을. 오,주님! 그때 저는 과연 구원을 받은 자일까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령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무한 광대하시고 영원하심 앞에 너무나도 부족한 한계 상황에서 연약한 존재로 살아가는 우주의 띠끌과 같은 인생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지하게 살게 하시고 일시적 쾌락보다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재현목사 / 가람교회 


화-벼랑에 선 교육을 위하여
본문: 사사기 2:2-5, 디모데후서 3:13-17
찬송가: 187장
 
최근 학교폭력이 위험 수위를 넘어가고 있다. 교육이 흔들리고 있으니 앞날이 걱정된다. 인생의 4계절이 있다면 청소년의 시기는 봄과 같다. 연약한 새싹이 나오기 전에 잘려지고 상처받게 된다면 나머지의 시간은 고통의 계절이 되고 말 것이다.
 
수목원의 나무들 중 좋은 나무는 잘 자라서 귀한 곳에 심겨지게 된다. 이처럼 학교와 가정은 자라나는 자녀들을 바르고 곧게 키워서 사회에 내어 놓아야 할 책임이 있다.
 
오늘 교육의 문제점은 일부 부모의 자녀교육이 인간됨보다 성적을 우선시 한 것에 기인한다. 최근 한국은 경제와 지식이 성장했으나 도덕 윤리의식이 결여되었다.
 
참 인간됨은 내 곁의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인간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잘 훈련받지 않으면 안된다. 학교나 군대보다 교회는 인성을 바르게 교육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곳이다. 오늘의 청소년 교육이 가정에서조차 그 책임을 다 할 수 없다면 교회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을 흔히 호모 사피엔스 또는 에렉투스라 부른다. 그러나 바른 인간으로 교육되지 못하면 에드가 모링의 말대로 인간은 Homo Demense 즉,광기의 인간이 되고 만다. 광기의 인간은 지식자양분으로 인해 풍요로워지기도 하며 환상과 몽상으로 비대해지기도 하는데 쾌락에 의존적이며 한낱 사물의 위치로 전락되기 쉽다. 이런 광기적 인간은 합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고 무절제,무규범,혼란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유네스크의 총재였던 페델리코 마이어씨가 인간의 미래 교육에 관해 한 학자에게 집필을 부탁했는데 그의 답은 이러했다. "허무한 지식의 맹목적성을 조심해야 하고,인간을 소외시키지 말아야 하고,사회와 인간이 맺은 계약과 질서에 순응하도록 해야 하고,인간의 윤리를 갖게 해야 하고,불확실성의 미래에 대비하도록 해야 하며 지구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이 지금 시대의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시대에 크리스찬은 어떠해야 할까? 먼저 크리스찬의 가정이 예배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회복의 영을 가져야 한다. 가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신앙교육에 힘써야 한다.
 
세상을 사랑함이 옆구리에 가시가 됨을 알게 해야 한다. 옆구리에 가시가 박히면 전쟁을 올바로 수행할 수 없다. 영적 전쟁도 부도덕이란 가시가 옆구리에 박히면 승리할 수 없다. 또한 진실을 교육하는 부모와 교사가 되어야 한다. 지식보다 지혜와 진실의 본을 보이며 교육해야 한다. 성경교육을 통해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야 한다. 구령의 열정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생명의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생명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세상을 빛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하자.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폭력과 부도덕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교육하게 하소서. 예배로 자녀들의 영이 회복되게 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가르쳐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정기목사 / 조수교회


 

수-탄식의 에바다
본문: 마가복음 7; 31~37
찬송가: 366장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에서만 있는 사실로 이방 땅 데가볼리에서 예수님의 상세한 치유기사이다. 또한 본문에 대한 이해는 7장 1-23절과 7장 24-30절의 속에서 기록 의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마가는 앞에서 유대의 구전 율법 특히 의식적 정결에 관한 법을 폐하신 사건을 기록한 후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방 지역 전도를 서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이방 여인과 만났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겸허한 믿음을 칭찬하심으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개방된 것임을 시사하셨다.
 
그런 후 중복장애인,귀먹고 벙어리 된 자를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예수님은 절망적인 중복장애를 "에바다!"라는 말씀 한 마디로 완전히 낫게 하셨다. 중복장애로 듣지 못하고,말을 더듬는 이에게 "열려라!"라고 명하셨다. 곧 귀가 열려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육체적인 장애보다 훨씬 불행한 장애는 정신적인 장애,영적인 장애이다. 그들은 세상에 자기보다 못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 귀 막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평화,정의를 외치는 그리스도인은 탄식하는 현장의 소리를 듣고,혀가 풀려 외쳐야한다.
 
첫째,주님의 탄식 소리를 들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도가니 사건'과 '에바다 사건'은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다. 에바다법인이나 도가니의 우석법인은 모두 청각장애인 학교다. 두 법인 모두 족벌재단이었고,횡령,성폭행,강제노역 등 문제가 많았다. 15년전 에바다 투쟁부터 시작해 인화학교,성람재단,석암재단 등의 시설비리가 터져 나왔어도 해결하지 못했다. 김대중대통령 대국민담화중 장애우 한분이 "에바다사건은 어쩔거냐"고 말해 그의 열린 입으로 사건을 드러냈을 때,3차에 걸쳐서 해결하게 됐다. 에바다와 도가니는 똑같이 농아인의 진술을 바탕으로 소요와 내부적인 정보가 전달됐고 고소 고발돼 법정에 서게 됐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탄식소리인 현장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둘째,"에바다!"라고 명하신 것처럼 중복장애의 문제를 바로 해결해야 한다. 학령기의 장애학생은 제대로 배워야 한다. 또한 또래집단과 어울리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성을 키워주는 것도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책무이다. 시설 안의 장애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법적장치로 공익이사제를 도입하고,탈 시설 자립생활과 권리실현을 위한 방안 마련이 되어야 한다.
 
셋째,사람들을 놀라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놀란 내용은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 것이다.  "에바다!"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우리는 귀가 열리고,혀가 풀려야 한다. 장애인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들은 사실에 대하여 주저없이 말하며,지역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공존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자립으로 장애인 생명을 새롭게 살려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
주님! 우리의 귀가 열려 예수님의 탄식소리인 부정의한 현장의 소리를 듣게 하시며,혀가 풀려 생명,평화,정의를 주저 없이 선포하여 '탄식의 에바다'로 세상을 놀라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태효목사 / 성수삼일교회


 

목-어째서 작게 여기느냐?
본문: 겔 34:18, 눅 16:19-22
찬송가 : 215장
 
처절한 가난,견디기 힘든 질병,가혹한 고독에서 삼중고의 인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다. 바로 신약 성서에 나타난 나사로라는 사람이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주님의 도우심'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의 거처는 고래 등 같은 집이 아니라 부잣집 추녀 밑이 잠자리였고 그의 식탁은 고작 부잣집 쓰레기통이었다. 그의 방문객은 동네 개들만 그의 뒤를 따라 다닌 것을 봐도 주님의 도우심이라는 '나사로'라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살다 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대개 사람들은 놀라운 은혜는 대단하게 여기는데 일상적 은혜는 아주 작은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실로 잘못된 생각이다. 불면증 환자를 생각해 보면 하룻밤의 단잠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위암 환자를 생각해 본다면 한공기의 밥을 맛있게 먹는 일이 어찌 축복이 아니겠는가?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내뿜는 호흡의 감격은 천식 환자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상적인 은혜를 작은 일로 여긴다든지 작다고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배은망덕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농부들이 뿌린 씨앗이 100퍼센트 결실하지는 않는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짝밭에 떨어지매 뜨거운 햇볕에 타 죽어 버렸고,더러는 가시덤불에 막혀 결실치 못했고,옥토에 떨어진 씨만 결실한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 즉,결실할 수 있는 확률은 사분의 일에 불과하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믿으려 하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는가 하면,또 어떤 이는 신앙에 겨우 입문만 해 놓고 중간에 탈락해 버린다. 혹자는 신앙생활을 계속 유지는 하나 만년 미숙아로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정말로 바르게 믿고 깨달아 결실하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 방언,입신,진동 등으로 열을 올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작은 일로 여기는 자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은혜를 작은 일로 여기지 말아야 하며 십자가 보혈의 구원의 은총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에 몸둘 바를 모를 만큼 황송해 했다. 작은 자 중에 작은 자가 큰 일 중에 큰일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엡 3:8)
 
오늘날 교회 제직 중에 오만하고 나태하고 불충한 일꾼들이 적지 않다.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며 세상 직책에 충성하는 열정의 절반도 교회직분에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충이다.
 
주님의 일꾼된 은혜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집사이든 권사이든 장로이든 목사이든 간에 주님의 일꾼된 은혜를 작은 일로 여기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자.
 
<오늘의 기도 >
주님께 받은 직책은 모두 성직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일 하듯 하는 불경한 죄를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다윗 임금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사역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창희목사 / 함양교회


금-날마다
본문- 행2:37~47,
찬송가: 301장
 
거미도 줄을 먼저 쳐놔야 벌레를 잡고,  칼도 먼저 갈아놔야 쓸 때가 오고,구두도 닦아놔야 외출할 기회가 오듯이 성도가 은혜를 먼저 받아야 문제 앞에 당황하지 않는 법이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성령 충만을 받으니 날마다 기쁨의 잔칫집과 같은 삶을 살아갔다. 올 한해 뭐를 해도 날마다 더해가시기를 바란다. 장사를 해도 수입이 날마다 더해가고,농사를 지어도 수확량이 더해가고,교회마다 부흥이 날마다 더해가는 한해가 되자. 초대교회의 현황표를 살펴보니 날마다 더해갔더라고 했다. 뭐가 그렇게 날마다 더해갔을까?
 
첫째,회개운동이 날마다 더해갔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날마다 더해간 것이 회개였다. 순간순간 말씀을 받을 때 마다 '어찌할꼬'하는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 신앙공동체에도 이런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회개는 맑은 물이 되기 위한 정수 과정과 같다. 3급수의 물이 정수할수록 2급수,1급수의 물이 되는 것처럼 회개도 하면 할수록 영이 맑아진다. 이 땅에서도 죄를 날마다 더하면 지옥 같은 삶을 살지만 회개를 날마다 더하면 천국 같은 삶을 산다.
 
둘째,사랑이 날마다 더해갔다.
 
사랑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내가 베풀면 언젠가는 그 사랑이 내게로 다시 돌아 오게 된다. 작가는 작품으로 자기를 드러내고,가수는 노래로 자기를 드러내고,성도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증거한다. 명색이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인간관계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다. 은사도 받고,기도도 많이 하는데 상대와의 관계가 별로인 사람들을 종종 본다.
 
예수님께서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처럼 교회도,가정도 사랑이 없으면 삭막한 사막과 같다. 부부사이에도 사랑이 식으면 남남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교회가 부흥하는 데 많은 요소가 있지만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새는 날개가 생명이듯,자동차는 엔진이 생명이듯,가정은 사랑이 생명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이 되는 비결 역시 사랑이다.
 
셋째,표적과 기사가 날마다 더해갔다.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하므로 날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다. 오늘날도 성령이 충만한 가정,성령이 충만한 교회에는 이적과 기적이,응답과 해결이 날마다 일어난다. 병든 사람이 고침 받고,낙심한 자가 새 힘 얻고,절망이 희망이 되고,미움이 사랑으로 변하는 역사가 나타난다.
 
오뚝이는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 있는 쇠뭉치로 인해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체험이 있는 성도는 환란과 시험이 와도 날마다 주님을 의지한다. 올 한해 우리의 교회와 가정에 초대교회와 같이 날마다 좋은 일들이 더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모든 교회와 가정들이 초대교회와 같이 날마다 좋은 일들이 더해지기를 기도합니다. 형편과 환경이 다 달라도 믿음으로 체험하고 말씀으로 순종하여 든든히 서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명운목사 / 항도교회


 

토-성경을 이루는 가정
본문: 마가복음14:43-50
찬송가: 341장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에 있다. 이 기간동안 성도들은 주님의 구원사역을 묵상하면서 경건하게 보내야 한다. 기쁨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기쁨인가? 부활의 기쁨이다. 지금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나? 우리는 고난에 머물러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성경의 말씀을 이뤄 나가셨던 것처럼,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성경의 말씀을 이뤄나가는 가정이 되자.
 
첫째,고난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때나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사람들은 예수를 잡을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고난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시고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받는 고난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71절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고난이 있는가? 기뻐하길 바란다. 주님이 허락하셨다.
 
둘째,기도로 고난을 준비한 가정이 소망이 있다.
 
고난은 우리의 인생 속에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속에 "이 고난을 없이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어떤 고난이 와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더 적극적인 기도이다. 하나님이 훈련하시기로 작정한 사람. 하나님이 복주시기로 작정한 사람,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집중적으로 더 고난이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은 죽을 줄 알고도 그 길을 걸어가셨던 분이다. 그 죽음 뒤의 부활을 위해서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 길을 기도로 준비하셨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시는 그 고난을 주님은 기도로 준비하셨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고난이 있을 것을 알고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셋째,고난의 길은 혼자 가는 외로운 길이다.
 
예수님께서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히시고 그 고난의 무서운 길을 들어서시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자들은 하나같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정말 어렵고 힘들 때 우리 곁을 떠나 가버리고 아무도 없는가! 서러워하지 마라. 예수님도 그랬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의 목전에 서 계신다. 예수님은 이미 때가 이른 것을 아시고 기도로,마음으로,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그 복종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 순순히 모든 것을 받아 들이셨다.
 
천국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도 피할 것을 기도하지 말고 당당하게 싸워서 이길 것을 기도하길 바란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고난은 하나님께로 오는 것을 믿습니다. 고난이 오면 남을 탓하지 않고 고난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복을 바라보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석일목사 /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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