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3월 05일(월) 16:35

 제17회 총회장 염봉남 목사(1928-1929)
 
염봉남(廉鳳南, 1875-1936) 목사는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뜻하지 않게 미국인이 우리말로 전도하는 일이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갔는데 말만 들어보았던 미국인을 가까이 가 보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염봉남은 이때 쪽 복음을 들고 와서 마태복음을 펴 들고 1장부터 읽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족보 이야기를 읽은 순간 이 종교는 양반이 믿을 종교라는 사실을 알고 계속 읽어 가는데 양반뿐만 아니라 천민도 읽어야 할 책임을 알고 그는 선교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나섰다.
 
안의화(J. E. Adams)선교사와 인연이 되어 안의화 선교 구역의 조사로 임명을 받고 활동을 하는데 안의화 선교사는 그의 열심에 놀라고 말았다. 안의화 선교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15년 3월에 장로회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신학 수업을 마치자 곧 자신이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던 경북 경산읍교회에서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1920년 9월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경산읍교회에서 성실하게 목회했던 염봉남 목사는 경북노회 내에서 이름난 목사로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대구 신정교회에 당회에서는 염봉남 목사를 하였지만 염봉남 목사는 신학교 재학 시절 매월 생활비를 보태주고 가족들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성미까지 지급 해 준 경산읍교회를 모른다고 떠날 수가 없어서 거절을 하였다.
 
대구 신정교회 당회원들이 경산읍교회를 드나드는 것을 눈치챈 당회원들은 염봉남 목사를 보다 더 큰 도시에 가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권유를 하면서 대구 신정교회에 부임하게 된 일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대구 신정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안 된 염봉남 목사는 1928년 9월 제17회 총회를 개회하게 됐다. 총회장으로 당선된 염봉남 목사는 말 할 것 없이 대구 신정교회 교인들은 그렇게 좋아 할 수 없었다. 사회석에서 총회를 진행하면서 한국에서 중국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에게 만 7년이 되면 1년씩 안식년을 주기로 결의를 하였다. 각 노회에 농촌부를 설치하고 '농민생활'잡지를 발행키로 하였다.

 제18회 총회장 차재명 목사(1929-1930)
 
차재명(車載明,1881-1947) 목사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1905년을 맞이하자 국가가 어려움에 처하자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세력은 기독교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용암포교회에 출석을 하였다. 그 후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선천에 있는 신성학교에 진학을 하였으며, 윤산온 선교사의 추천을 받고 1910년 서울 새문안교회 조사로 활동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게 됐다. 그는 새문안교회의 조사가 된 일에 대해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넣어 주었다. 이러한 결과로 1912년 31세의 나이로 새문안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고 장로로서 활동을 하게 됐다.
 
차재명 장로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여,모든 과정을 마치고 1916년 10월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그 후 차재명 목사는 1920년 가을노회에서 새문안교회의 청빙을 받고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차재명 목사는 관서지방 출신이었기에 관서지방 총회 총대들의 힘을 얻어 총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총회에 남긴 업적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바로 그가 편저로 내 놓은 책이 1928년에 발생한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였다. 이 역사책은 차재명 목사가 총회로부터 위임을 받고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놓은 책으로서 지금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1차 자료로 이 책을 참고로 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어떤 교회가 몇 년도에 누구에 의해서 설립됐음을 상세하게 기록을 남기었다.
 
1929년 9월 차재명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새문안교회에서 제18회 총회를 개회하였다. 이때 차재명 목사가 제18회 총회장으로 당선이 됐다. 제18회 총회에서 여전도인에게 강도권을 허락해 달라는 헌의에 대하여는 교회의 형편에 따라 목사,강도사,장로 외에 여전도인에게도 강도 시킬 수 있음을 총회장으로서 답변을 함으로 여성의 지위 향상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설립된 조선신학원을 설립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