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이방인

[ Deaf Story ] 우리 시대의 땅끝-Deaf Story 8

김유미원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28일(화) 16:19

2002년도 여름, 미국 워싱턴 D.C.에 전 세계 농인들이 모여들었다. 전 세계 농인들의 대축전인 'Deaf Way II'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도 우리나라 농인들과 함께 워싱턴 D.C.로 향하였고 그 곳에서 3주간 머물렀었다. 당시 우리 팀에는 농인들이 20여명, 청인은 4명 정도 있었는데 두 그룹의 모습이 매우 대조적이었음을 기억한다. 청인들은 언어소통문제(영어)로 조금씩은 위축되고 고생을 한 반면 농인들은 매우 유연하게 소통하며 적극적으로 일정을 소화했던 것이다. 만약 구성원이 시각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이었다면 외국 땅에서도 비장애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여전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다른 외국에서 한국수화를 하는 청인이 농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면에 농인들의 경우, 어차피 일생을 수화언어가 안 통하는 낯선 외국 땅에서 사는 셈이기 때문에 미국 땅이라고 해서 새삼 어려울 것이 없는 듯 했고 오히려 그간에 체득한 의사소통 능력을 맘껏 발휘하며 여정을 즐기고 있었다. 그 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로 간에 수화는 다르지만 세계에 흩어진 동족(Deaf race)들과 조우하는 즐거움으로 인해 일정 내내 그들에게는 기쁨과 흥분이 가득하였던 것이다. 마치 디아스포라 유태인들의 거대한 성회처럼….
 
농인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장애인에 고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농인에게 제대로 접근할 기회를 잃게 된다. 농인은 청인과는 다른 문화기반을 갖고 수화라는 언어의 꽃을 피워낸 언어적 소수자이다. 문화가 다르므로 같은 현상을 보고도 청인과는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농인의 수(數)는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청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적다. 이렇게 소수자인 농인들의 삶은 미국의 한인사회(이민1세대)를 닮아 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한국인들은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3D업종에서 육체노동을 주로 해야 했고 미국인들의 눈에는 이해 못할 부분을 많이 갖고 있는 낯선 존재들이었으며 한인교회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언어갈증을 해소하고 미국사회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와 힘을 얻었다. 한국의 농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인 한국수화로는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없으므로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전문직이나 사무직에 진출하기 어렵고 기술직이나 육체노동을 주로 하고 있으며 청인들의 눈에는 이해 못할 부분을 많이 갖고 있는 낯선 존재들이고 농아인협회와 종교모임을 통해 언어갈증을 해소하고 청인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와 힘을 얻는다.
 
초기 한인사회가 미국 주류사회에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 땅의 농인들은 언어적 장벽 때문에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는 훈련과 경험의 기회를 거의 얻어 보지 못하고 살아 왔다. 청인들이 농인을 만났을 때 그들의 모습에서 이해 못할 부정적인 면들을 보았다면 그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 그들이 태생적으로 무지하거나 열등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청인들이 농인과 대면할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이 이중언어 이중문화의 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주류사회의 중심에 들어와 활동할 기회가 좀처럼 없던 사람들임을 기억하고 이해해준다면 훨씬 유연하고 의미 있는 만남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김유미원장 / 한국농문화연구원 (http://deafcultur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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