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빈들의 밥상

[ 생명밥상 ] 기독공보 생명밥상 캠페인

정경호교수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28일(화) 15:25
마가복음 1장 6절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은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메뚜기와 석청으로 대변되는 세례 요한의 밥상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세례 요한의 밥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의 분봉 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로마제국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기 위해서 왕으로 위임된 아버지 헤롯 대왕과 로마의 왕 아우구스투스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종의 인질로 로마에서 모든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기원전 4년 아버지 헤롯 대왕이 죽자 그의 형제들과 함께 왕국을 분할하여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왕이 되었는데 그는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의 공주 파샬리스와 결혼 했으나 이혼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이복동생인 빌립 2세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을 하여 세례 요한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다. 이에 헤로디아는 그를 부추겨 요한을 잡아 가두게 했으며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잔치에 자신의 딸을 시켜 요한의 목을 가져오도록 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잔치의 밥상은 어떠했을까? 마가복음 6장에 나타나는 헤롯의 잔치의 밥상은 당시 로마의 밥상과 매우 흡사한 밥상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로마제국의 밥상은 부요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밥상은 질적으로 다른 양극화된 밥상이었다.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주로 보리로 만든 거친 빵, 곡물로 만든 국수와 옥수수 가루 죽 등을 먹었으며 콩, 무화과, 올리브와 함께 치즈를 먹었다. 그러나 가끔은 구운 돼지고기나 소금으로 간을 한 생선도 사 먹기도 하였다. 반면 부요한 로마사람들은 자신의 부와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많은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이때 주인은 값비싼 최고급 재료들을 준비하여 음식을 만들어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려 하였다. 에프타이저로 불리는 식전 요리가 두 차례 나왔으며 본 요리는 세 차례나 나오는데 처음엔 살찐 어린 닭과 암돼지 요리와 토끼 요리와 함께 구은 생선 요리가 나오고 그 다음엔 수컷 멧돼지 고기와 함께 각종 대추가 나오면 마지막으로 통돼지와 함께 맛있게 삶은 송아지 고기가 나온다. 그리고 후식도 두 차례나 나오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의 밥상이었다. 대계는 본 요리 두 번째가 되면 먹었던 음식을 바깥에 나가 토해내야만 다음의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밥상은 헤롯이 벌리고 있는 잔치의 밥상과도 거의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마가복음 6장 27
~28절은 한걸음 더 나아가 먹고 마시고 토해내는 잔치의 절정에서 세례요한의 목을 잘라 그 목을 잔치 밥상에 올려놓은 죽임의 밥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며 음식을 통해 하나님을 맛보는 밥상이 아니라 온갖 악취가 난무하는 죽음의 밥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반해 세례요한은 약대 털로 짠 옷에 가죽 허리띠를 멘 허름한 옷차림으로 다닌 가난한 예언자였다. 그가 입었던 약대털옷이나 그가 먹었던 즐겨 먹었던 메뚜기와 야생 꿀인 석청은 한마디로 그의 절제된 검소한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메뚜기를 히브리어로 하가빔이라고 하고 쥐엄나무를 하루빔이라고 한다. 아마 서기관들이 두루마리성서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잘못 기록하여 광야에서 흔한 쥐엄나무 열매가 메뚜기로 잘못 기록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논란이 있기도 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로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쥐엄나무 열매를 "세례요한의 빵"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무튼 그것이 쥐엄나무이든 메뚜기든 세례요한은 스스로 가난하여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살면서 당시의 병든 사회와 종교를 개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도 특별히 세상 구석구석에 있는 가난한자의 편에 서서 가난한 자들이 먹는 검소하고 절제된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이는 음식이 바뀌면 신앙이 바뀌고 신앙이 바뀌면 세상도 변형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세례 요한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경호교수/영남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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