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들을 품을꼬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젊은이를 위한 팡세

조정민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28일(화) 14:56
모든 나이에 겪는 고통이 있고 그 나이에만 누리는 기쁨이 있다. 요즘 학생들의 고통과 기쁨은 어떤 것일까. 예전 학교 모습이 떠오른다. 얼마나 지금과 달랐던가. 이제 수세식 화장실도 흔해졌다. 한겨울 난로 위에 수북하던 도시락은 사라졌다. 힘겹게 튕기던 주판도 보기가 어렵다. 대신에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생겨났다. 동네에 한 두 대였던 전화기가 누구나 손에 든 물건이 되었다.  계산기나 시계는 물론이고 온 세상 TV와 도서관과 음악이 손 안에 다 들어왔다.
 
중고등학교에 가본 사람이면 이 놀라운 변화에 혀를 내두른다. 누가 연단에 올라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모두가 다같이 누군가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온 강당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 그런 것은 없다. 큰 소리를 지른다고 침묵하지 않는다. 흥미 있는 얘기를 한다고 사람 얼굴만 바라보지 않는다. 들으면서도 다른 것을 보고, 보면서도 다른 것을 메모하고, 쓰면서도 다른 사람과 얘기한다. 바로 곁에 앉아서도 메시지를 주고받고, 몇 시간씩 마주앉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을 수도 있다. 핸드폰만 있다면 이들은 어디에 있건 곁에 무슨 일이 일어나건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런 기이한 모습보다 학교 안의 얼룩진 폭력이다. 학생들의 외관이야 세상이 달라진 만큼 달라졌다 하더라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폭력의 문제는 그냥 놀라고 말 일이 아니다. 이건 교육 본질의 문제이다. 교육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건강한 공동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면 교육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니 어떻게 학교가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는가. 왕따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고 조직폭력배 흉내를 내며 교실을 두려움으로 내모는데…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고 크리스천은 무엇을 하고 있나.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자살한 친구를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급우들이 흐느끼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내 아이들이 이미 졸업한 것에 안심하면 되는가. 아이들을 유학생으로 내보내고 학교를 외면하면 되는가. 교회는 주일학교만으로 자족해야 하는가. 대안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쏟는 것으로 충분한가. 제도권 학교와 더욱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가. 이렇게 끝없이 학원으로 사교육으로 학생들을 내모는 것이 온당한가. 이 시대의 교회와 크리스천은 이웃의 고통, 다음 세대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120년 전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에 목숨을 걸었다. 복음은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어 그 혜택을 누린 수많은 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지금 다시 이 땅에 당시의 선교사들이 와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가 선교사가 되어 2만 3천 명 이상이 열방에 흩어졌다. 그들을 내보낸 우리는 이 땅에 남아 어떤 몫을 감당해야 하는가. 사방에 손가락질 받는 교회가 고통 받는 이 땅의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의 창을 내야 하나. 다시 교육이다. 교육이 무너지면 무너질수록 학교가 황폐하면 황폐할수록 학생이 병들면 병들수록 예수님이 희망이다. 한국 기독교는 다시 그 진가를 드러낼 기회를 맞고 있다. 누가 알겠는가. 교육이 지식이 아니라 사랑임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끝까지 품고 사랑하며 성품을 바꾸는 일을….

조정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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