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컬서당>제5차 나이로비 총회(1975년)

[ 선교 ]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2년 02월 27일(월) 15:01

5차 총회는 최초로 아프리카에서 열렸다. 아프리카는 식민지 착취를 받은 가난한 땅이었고,노예제로 수 많은 인간이 수탈된 땅이며,백인정권에 의해 인종차별 정책이 여전히 남아있는 대륙이었다. 또한 아프리카 교회들은 지도력과 재정적인 면에서 여전히 서구교회로부터 자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1971년에 동아프리카 장로교회 총무였던 존 가투는 선교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아프리카 교회의 자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나이로비 총회에는 2백85개 회원교회로부터 6백76명의 대표들이 참석했으며,당시 WCC 총무는 도미니카 출신의 필립 포터(Philip A. Potter,1972~1984)였다.
 
WCC는 웁살라 총회 이후 사회참여를 강화하기 위한 기구개편을 단행했다. △인종차별철폐위원회 △교회개발참여위원회 △그리스도교의료선교위원회 △교육위원회 △살아있는 신앙 및 이데올로기와의 대화 등의 조직이 신설됐다. 1971년엔 기독교교육세계협의회가 WCC에 통합됐다. 1973년 방콕에서 열린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는 '오늘의 구원'을 발표했다. 방콕대회에서 아시아 교회들은 존 가투가 제안한 선교 모라토리움을 지원했으나,나이로비 WCC 총회는 모라토리움을 수용하는 대신 '선교적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켰다.
 
5차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하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신다'(Jesus Christ Frees and Unities)였다. 나이로비 총회 주제는 종말론에서 다시 기독론으로 돌아왔다. 이 총회는 사회참여를 지속하면서도 해방과 진보의 슬로건에 가려있었던 선교와 일치의 주제를 다시 부활시키려고 했다. 필립포터는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웁살라는 출애굽의 분위기였고,나이로비는 광야" 같았다고 했다. 기존의 WCC 총회 주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해 '시대적 징표'를 담아서 대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에큐메니칼 운동의 딜레마는 예수를 해방자(Frees)로 고백하면서,동시에 분열자가 아닌 화해자(unites)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1~2차 총회는 '비교교회론',3~4차 총회는 '가시적 교회론'을 나타냈다. 그러나 나이로비 총회의 교회론은 가시적 일치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론을 모색했다. 그 결과 개 교회들이 성만찬의 교제를 통해 가시적 일치를 표현해야 한다는 '협의회적 친교'를 주장하게 되었다. 협의회적 친교란 지역교회들이 각자가 지닌 독특한 은사를 지키면서도 보편교회를 나타내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편성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특수성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나이로비 총회는 에큐메니즘을 '전 교회'가 '전 세계'와 '전 인격'에 '전 복음'을 전하는 운동으로 정의했는데,이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진정한 통전적인 에큐메니즘으로 확대된 것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이었다. WCC 총회로는 최초로 타종교인들이 초청된 나이로비총회에서는 다양한 논의 중에도 '정의롭고 평화롭고 지속 가능한 사회'(JPSS)가 제시됐다. 당시 서구 국가들의 과학자들은 생태계 파괴와 자원고갈 문제에 대해 인류가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성장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개발도상국가들은 서구의 이런 주장을 비윤리적이라고 반발했다. 바로 JPSS는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의견을 나눴다.
 
(자문:서울장신대 정병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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