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돋는 골목길'과 가짜 막걸리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 방 이야기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21일(화) 14:24
전문 기독교극단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해 가던 중,70년대 후반부터는 서서히 교회 안에서 작품들을 연출하여 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규모를 제대로 갖춘 공연이 아니라 일종의 워밍업이나 실습 개념의 공연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기간을 도마의 시선으로 그린 이강백 극본 '도마여,그대는 보고 믿는가?',세태풍자와 기독교윤리를 성찰하는 김지하 원작 '금관의 예수',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신앙양심과 순교라는 주제를 다룬 '코르작크와 그의 고아들'과 같은 작품들이었다. 미숙한 부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 기독교극단의 출범 가능성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연극이 선교매체로서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전문기독교극단 창단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필자가 쓰고 연출했던 '해 돋는 골목길'이었다.
 
당시 청년부에서 해마다 여름과 겨울 두 차례 농어촌 미자립 교회를 선별하여 4,5일간 전도대를 파송했었는데,주요 프로그램은 축호전도,어린이 성경학교,근로봉사,의료봉사,경로잔치,저녁집회 등이었다. 그 가운데 경로잔치에서 마을 노인들을 대상으로 전도용 연극을 공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동감하여 급히 만든 작품이 '해 돋는 골목길'이었다.
 
전과 5범의 중년 가장이 거듭되는 실패에 스스로 운명론자가 된다. 세상과 자신을 저주하며 삶을 포기하려는 극한 상황에서 복음을 접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런 지극히 단순한 플롯의 전도용 단막극이었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목적극이라 할 수 있다. 실상 노년층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너무 관념적이거나 어려운 작품보다는 쉽고 직설적이며,재미있고 현실적인 작품이 필요했다. 가난한 달동네의 고단한 삶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그러다보니 다소 거친 대사도 불가피했지만 친근한 생활용어와 웃음을 버무려 걸쭉한 한 편의 드라마가 됐다.
 
시골 교회의 좁은 강대는 셋방과 선술집과 골목을 구분하기조차 어려웠지만,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극과 현실을 자주 혼동하는 순수한 관객들로 인해 공연의 현장은 금세 뜨거워졌다. 극의 초반에 주인공 강털보가 가족들과 마을교회 목사에게 행패를 부리는 장면에서는 "저런 못된 놈!","천벌을 받지!" 등등 사방에서 질타가 쏟아지더니,후반에 이르러 발악하던 주인공이 마침내 복음 앞에 굴복하게 되자 "인저 사람 됐네 그려","아이구 주여…!" 등으로 반응이 바뀌었다.
 
더러는 눈물을 훔치는 노인들도 눈에 띄었다. 물론 은혜로운 모습만 보였던 건 아니다. 어떤 노인은 술집 장면으로 전환될 때마다 무대 쪽으로 고개를 잡아 빼고는 군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마시는 막걸리는 흰 우유 80%에 커피우유 20% 비율로 섞은 가짜였지만 누가 봐도 영락없는 진짜 막걸리로 보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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