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장 열전] 김수진목사의 총회장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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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20일(월) 17:14

 제13회 총회장 이자익 목사(1924-1925)
 
이자익(李自益,1882-1959)목사는 이기진과 박정근 사이에서 경남 남해도 이동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유년시절에 부모를 잃고 얼마동안 친척집에 돌아다면서 생활을 하였지만 바다 건너 육지를 가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육지로 가는 배에 무조건 승선하여 경남 하동을 거쳐 전북 김제군 금산까지 오게 됐다. 이때 이자익에게는 조덕삼이라는 지주집에서 짐을 풀고 그 집 머슴으로 생활을 하게 됐다. 때마침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던 데이트(최의덕)선교사가 1905년 금산에 도착을 하고 조덕삼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를 하였다. 이미 조덕삼 부부는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음을 알았던 그는 선교사를 만나자 그 자리에서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이자익과 함께 금산교회를 설립하였다.
 
1905년 10월 조덕삼,이자익,박희서 등이 세례를 받고,금산교회는 최의덕 선교사가 예배를 인도하였다. 또한 매년 실시하는 사경회에 참가했던 조덕삼과 이자익은 신앙이 성장해 가자 최의덕 선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최의덕 선교사의 예배 인도로 얼마간 계속 되자,조덕삼과 이자익은 이 교회의 첫 영수로 선택을 받고 금산교회를 이끌고 갔었다. 1908년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 마부인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먼저 피택됐다. 장로가 된 이자익은 주일이 되면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담당하였으며,이자익 장로는 조덕삼 영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10년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 진학 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를 하였으며, 그가 비어 있는 사이는 조덕삼 영수가 이끌고 갔었다. 조덕삼 영수도 1910년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이자익은 1915년 졸업을 하자 전라노회에서 목사를 받고 금산교회 2대 목사로 위임을 받았다.
 
1924년 9월 제13회 총회가 함남 함흥에 있는 신창리교회에서 개회되었다. 이때 금산교회에서 시무하는 이자익 목사가 선임됐다. 이때 총대원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총회장으로서 실수함이 없이 잘 회무를 잘 이끌고 갔으며,이때 총회는 총회 시 무단 조퇴 자는 차기 총대에서 피선거권을 박탈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제14회 총회장 임택권 목사(1925-1926)
 
임택권(林澤權,1885-1950) 목사는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였다. 임택권은 소안론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때 임택권은 소안론 선교사의 권유를 받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임택권은 그의 신앙 성장에 놀란 소안론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구역 내에 있는 안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하기도 하였다. 임택권 조사는 1914년 가을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은율읍교회 목사로서 목회를 하였다. 다시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면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에서 1년 간 연구생활을 생활을 하였다.
 
1925년 9월 평양 서부교회에서 모이는 제14회 총회에서 총회장에서 임택권 목사가 선임됐으며,그가 총회장으로 당선된 후 총회에서 몇 가지 결의된 사항이 있다. 꽃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변경키로 하였으며, 미션학교에는 반드시 교목을 두어 성경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중학교에는 목회자 자녀들의 수업료는 면제하는 일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기로 하였다. 장ㆍ감 교파 외에 다른 교파로 이적해 가는 교인들은 제적하기로 하는 철저한 장로교회 요리문답 교육을 실시하는 등 교인 관리에 철저를 기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최초로 한국인 남궁혁 박사를 장로회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취임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남궁혁 목사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직영하는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를 졸업 하였던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취임을 하게 되었다.
 
임택권 목사는 총회장으로서 임기를 마감한 동시에 1926년 명신고등보통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재령읍 서부교회에서만 열심히 목회에 임하였다. 원래 임택권 목사는 연구하기를 좋아하였기에 1928년 장로회신학교에서 1년 간 목회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다시 1939년 황해도 신천군 사평교회로 이동을 하였다. 그 곳에서 목회를 하였지만 한국전쟁을 만나면서 그의 행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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