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가는 무속신앙,외가는 독실한 불교집안

[ 이연옥명예회장의 향유 가득한 옥합 ] 이연옥회장의 향유가득한 옥합

이연옥명예회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06일(월) 17:25
사찰에 이름이 새겨진 위패 떼어내 혼줄

내 고향은 황해도 황주군 연봉리이다. 나는 아버지 이유근과 어머니 강의숙의 슬하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나는 내가 자란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부모님이 잠시 머물러 계셨던 평양에서 1924년 12월 2일에 태어났다. 이때 아버지는 평양의 금융조합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다. 얼마 뒤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고향 마을로 돌아오셨다. 그 이후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을 '평양네'라고 불렀다.
 
내가 자란 마을 연봉리는 주민이 3백호 정도 되는 제법 규모가 큰 동네였다. 농산물의 소출이 풍족했고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해마다 봄철에 식량부족으로 말미암아 겪는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모르는 동네였다. 황해도의 유명한 곡창지역인 재령벌 대문에 집집마다 쌀이 비교적 넉넉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부모님이 할머니를 모시고 사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셨는데 내 아버지가 4남매 가운데서 맏이셨다. 내가 태어나던 때에 우리 집안은 기독교 신앙의 가정이 아니었다. 외가집안은 독실한 불교 가정이었고 사찰을 지어 줄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고 한다. 학창시절 방학을 맞아 외가에 가 보면 외가는 근처에 있는 절을 위해 시주를 굉장히 많이 하며 물주 노릇을 했다. 시주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시주를 많이 한 사람들의 이름이 위패에 새겨진 내 이름을 보고서 놀란 나는 당장에 그 위패를 떼어 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외할머니가 나를 호되게 나무라셨고 내 이름을 다시 위패에 새겨 달도록 하셨다. 그러고 나서 외가에 놀러가서 그 절간에 들르는 기회에 나는 또 다시 내 이름이 새겨진 위패를 떼어 내곤 했다.
 
반면에 친가 집안의 종교는 꼭 꼬집에서 이것이라고 말하기가 좀 애매했다. 할머니는 무속신앙을 좇으셨고 아버지는 생활관습 속에 깊이 배어있는 유교의식을 따르셨다. 할머니는 방마다 신주단지를 모셔 놓았다. 심지어는 창고와 헛간에도 신주단지를 모셔 놓았다. 아버지는 조상에게 올리는 효도 차원으로 제사를 드렸으며,8대 선조의 묘소까지 챙기셨다. 그 당시 이북에서는 추석 명절과 한식에 성묘를 했고 정월 명절에는 성묘하지 않았다. 특히 추석 명절에는 음식을 장만해서 조상의 산소 앞에 차려놓고 후손들이 절을 했다. 그런데 8대 선조의 산소까지 일일이 다 챙겨야 하니,추석 음식을 머리에 이고서 조상들의 산소를 낱낱이 찾아다니며 성묘하는 일이 집 안에서 가장 큰 연중행사였다.
 
여성들은 제사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준비한 음식을 머리에 이고 성묘 행렬을 따라다녀야 했다. 내가 고향에서 자라던 때에 아버지는 사업을 크게 하셨다. 고기잡이 어선도 한 척 가진 선주셨다. 우리나라 남쪽에서 건어물을 사다가 황해도로 가져와서 파는 도매업도 하셨다. 아버지는 땅을 사고파는 부동산 투자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주 대단한 부자는 아니었으나 물질적으로 제법 여유가 있는 진취적인 사업가이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주권을 상실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은밀하게 관여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번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아버지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사건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아버지 잡수실 음식을 부랴부랴 챙겨서 유치장으로 면회를 갔는데 나도 함께 따라갔다. 그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나는데,아버지가 상해 임시정부에 돈을 갖다줬다는 혐의로 여기에 갇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사실을 한사코 부인하셨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다음에 아버지는 유치장에서 풀려나셨다. 평소에 아버지가 동네 유지로 일본인 형사들에게 '영감님'소리를 들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또 아버지가 실제로 상해 임시정부에 은밀한 방법으로 송금했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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