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 최종률장로의 빈방있습니까? ] 최종률 장로의 '빈 방'이야기

최종률장로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2월 06일(월) 15:17
필자가 걸어온 문화선교사역의 흐름을 독자들께 효과적으로 전달해 드리기 위해서 '빈 방'이야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강원도 출신인 나는 유년시절을 강릉에서 보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성결교회에 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초등학교에서는 어린이신문사 편집국장이라는 감투 덕에 취재하러 여러 곳을 탐방하며 틈틈이 글을 썼다. 식구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가고 혼자 외삼촌댁에 얹혀살던 6학년 때는 서울에서 전학 온 예쁜 여학생과 가슴 설레는 데이트도 경험하면서 예술가의 꿈을 키워갔다.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식구들과 합류했지만 살림살이가 너무 어려워서 끼니를 해결하기조차 버거웠다. 그러다가 사업을 하는 어느 부유한 중년부부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심리적으로 부대껴서 며칠 만에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문예반에 들어가려 했지만 미술 선생님이 붙잡아다가 억지로 미술반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정작 미술반 활동은 나의 낭만적인 기질을 담아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한편,미술실 맞은편에 음악실이 있었는데 성악 전공이셨던 음악 선생님의 영향으로 오페라에도 심취하여 밤마다 동네 개천 뚝방에 올라가 목청을 돋구곤 했다.
 
방안에서 잉크가 얼어버리는 차가운 셋방에서 벽에 종이를 붙여놓고 영화배우의 얼굴이나 풍경화를 그리고,일찍 배운 담배를 꼬나물고 자기도취하여 글을 썼다. 영화를 본 후 그 환상에서 몇 날을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 뿐인가. 드디어 연극을 만들었는데 동네에서 제일 부자인 의원집 아들을 설득해서 그 집 건넌방과 다락을 무대삼아 혼자 극본,연출,배우까지 겸하면서 공연을 했다. 물론 관객이라야 친구들이 전부였지만 잠재된 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뚝방에서 만난 구두닦이 소년을 따라 명동 뒷골목에 있는 그들의 아지트로 놀러갔다가 구두닦이들이 쓴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 마음이 발동하자 미술반 친구들을 동원하여 그림을 그린 다음 시화전을 열었다. 다음 해엔 다방을 빌려 문학의 밤을 열었고 가난한 아이들이 모이는 산허리 텐트교실에서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기도 했다. 가난과 고독과 방황의 청소년기를 나는 그렇게 열정과 예술혼으로 지탱해나가고 있었다.
 
미술대학에 입학하자 곧바로 연극반을 만들었고 첫 공연에서 다시 극본,연출,출연을 하는 호기를 부렸다. 교수님들로부터 전공인 미술보다 연극에 더 미쳐 있다고 비난을 받았지만,사실 미술과 연극은 조형적으로 공유하는 요소가 많은 인접예술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연극활동은 군에 입대한 후에도 계속됐다. 반공극을 만들어 예하부대와 지역사회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했던 것. 복학 후에는 여러 대학교 연극반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돌아다니며 연출을 했고 연출료 받은 것으로 여행을 즐겼다. 졸업학년이 되자, 대학극 동료들과 함께 전문극단을 표방하는 '상설무대'라는 극단을 창단하기에 이른다. 당시에는 대학로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은밀하고 작은 기적이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최종률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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