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불모지 산동성에 뿌려진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헌신과 눈물

[ 선교 ] 한국교회 중국선교 1백주년, 그 현장을 가다(하)

임성국 기자 limsk@pckworld.com
2012년 01월 30일(월) 15:01

1백년 역사의 흔적 곳곳에 남아 있지만,관리 소홀하거나 철거 위기 처해 안타까움
총회 지원으로 처음 설립된 '남관교회' 노후화, 한국교회 관심 절실
한인교회 '조용한 협력'으로 중국 기독교 부흥 이끌며 열매 이어가
   

   
▲ 1913년 래양에는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선교센터가 마련됐다. 사진은 남관교회와 선교흔적이 남아있는 래양 남정문 쪽의 골목 전경.

 
【산동성=임성국기자】"가르치는 선교에서 배우는 선교,배우면서 하는 선교로 나아갈 때 내가 소유한 예수님을 그들과 같이 소유함으로 드디어 선교는 열매를 맺게 된다"
 
올해로 1백주년(총회 선교사 파송 결의 시점)을 맞이한 한국교회 중국선교 역사에서 본교단 증경총회장 방지일목사(영등포교회 원로)가 사역 당시 선교 철학으로 여기며 강조했던 말이다.
 
중국선교의 산 증인 방지일목사를 비롯해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목사 등과 1913년 한국교회 최초로 타문화권 중국 여선교사로 파송 받은 김순호선교사,그리고 평신도사역자들은 각자의 은사에 따라 교회 개척,교육,의료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산동성선교의 열매를 맺었고,그 선교적 의의는 오늘날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소중한 유산으로 뿌리 내렸다.
 

하지만 1백년 전 선교의 자유가 없었던 이국 땅에서 현지인들의 능멸과 비웃음,교통의 불편,의료시설의 미비,자녀교육 문제,문화적 이질감 등으로 심한 고통을 당했던 당시 선교사들의 고충은 동일한 문제로 세계 곳곳에서 사역을 감당하며 고민하는 오늘날의 선교 동역자들을 위로하는 듯하다.
 
아픔과 상처,고통이 있었지만 산동성(山東省)을 희망과 기쁨,복음의 땅으로 변화시킨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헌신과 눈물의 흔적은 1백년이 지난 지금,완벽하게 보존되지는 못했지만 그 역사의 흔적들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지금이라도 중국선교역사 현장 보존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선교역사 보존에 대한 아쉬움을 가득안고 그들이 걸었던 그 땅,산동성지역의 선교유적지를 찾았다.
 
총회 최초 파송선교사 박태로목사가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머물렀던 웨이하이에 위치한 강서당은 아쉽게도 터만 남아 있고,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변화되고 발전한 중국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 1920년 총회가 지원하여 해외에 최초로 건축한 남관교회.


특히 1917년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가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한국교회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센터가 중국 래양(萊陽) 지역에 마련된 것으로 알려져 한국교회 선교사역의 역사와 전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총회가 재정적 지원을 통해 8백평의 넓은 대지를 마련하고 선교사 주택과 예배처소를 마련한 것.
 
특히 총회의 지원을 통해 최초로 설립된 래양 '남관교회'는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목사가 연합해 사역을 펼쳤던 곳으로 1920년에 새 예배당을 신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남관교회는 방지일목사의 아버지 방효원선교사가 1935년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거주하면서 주변 지방교회 선교와 함께 사역을 펼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90여 년이 지난 현재의 래양 남관교회는 교회 건축물 일부분인 한쪽 벽면만 남아있는 상태이고,개인 소유로 등록되어 있었다. 또 벽면 한쪽을 지탱하고 있는 돌기둥과 벽돌의 노후화는 당시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를 대변하는 듯 했다.
 
기자는 총회가 재정의 일부를 지원하여 해외에 최초로 건축한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 예배당을 선교 현장에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에 목이 메였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남관교회 예배당의 힘없는 운명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선교역사의 귀중한 자산인 남관교회의 보존을 위한 한국교회의 관심이 더욱 절실한 이유이다.

   
▲ 총회가 마련한 대지 위에 선교사들의 안정적 사역을 위해 마련한 선교사 사택.

 
한편 중국 선교 초창기 열악한 선교 상황을 파악한 총회는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 가정을 위한 2층 건물의 사택을 현지에 마련하고,래양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사역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선교사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사택 건물은 현재에도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었지만 관리가 전혀 안됐고,중국 정부의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돼 수년 내 철거될 것으로 예상되어 아쉬움을 더했다.
 
한편 현지 언어에 능통했던 홍승한선교사가 선교확장을 위해 1923년 래양을 떠나 지모에 세웠던 지모교회도 현지인들에 의해 보존되어 있었다. 현재는 중국 삼자교회의 관리를 받고 있었고,최근에는 교회 인근에 이대영 박상순 선교사의 사택 유적지도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방지일목사가 시무했던 중가와교회의 건물은 비록 사라졌지만,방 목사가 복음을 전했던 청도 거리와 동역자들의 증언은 중국선교를 위해 땀 흘린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열정을 대변했고,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전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관계자에 따르면 중국 산동성에는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한국교회 선교사들의 흔적이 곳곳에 묻혀 있고,선배 선교사들의 흔적을 찾기 위한 후배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편 1백년이 지난 현재도 산동성 곳곳에서는 한인교회들이 중국 땅을 향한 한국선교의 맥을 이어오고 있고,삼자교회와 가정교회는 '조용한 협력'을 통해 중국기독교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
 

본교단 목회자가 2007년 청도에 개척한 청도갈릴리교회(신라함목사 시무)는 최근 한류열풍에 힘입어 한글학교를 개원했고,조선족여성협회와 MOU를 체결하는 등 건전한 여가 문화를 위한 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중국 내 한인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1백년 전 믿음의 선배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이 한인교회 목회자들의 중론이다.
 
1백년 전 시작된 중국산동선교는 한국교회가 해외 선교운동의 시작을 빚은 사건이다. 한국교회는 그 역사 가치의 재발견을 통해 향후 1백년을 향한 선교 사역의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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