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과 'and'

[ 데스크창 ]

안홍철 기자 hcahn@pckworld.com
2011년 12월 20일(화) 09:24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기자가 되어 햇수로 24년째 기자생활을 하고 있지만,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예전에 신문방송학이라 부르던 학문은 요즘 대학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언론홍보학이나 미디어학,언론영상학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공보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친구도 있고,신학,국문학,영문학,기독교교육,사학 등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여있습니다. 저희가 일하는 현장이 교회이기에 신학 전공이 사실 저에겐 큰 힘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학 비전공자로 현장 기자생활을 20여년 넘게 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자기계발에 나태하지 않았는가?' 자문하게 되고 결국은 지난해 지천명의 나이에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이용해 언론홍보대학원 문을 두드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입학해 놓고 보니 등록금도 한학기 6백만원에 육박하고 주 3~4일 수업에 외국어 시험과 논문자격시험도 봐야하고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매 시간 읽어가야할 논문이 3~4편,독서리포트,텀 페이퍼에 시험까지…대학은 차치하고 마치 고등학교 수험생같은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더욱이 같이 듣는 동료들 중엔 방송사의 프로듀서,기자,아나운서,중앙 일간지 기자,대기업 홍보담당직원,영화감독 등 이 시대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현장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이들 틈에서 주경야독한다는 것 만으로도 많은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그래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은 참 행복합니다. 현장의 경험들이 이론을 통해서 하나씩 체계화되고 그래서 더 큰 시너지 효과를 갖게되고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을 볼 수있는 새로운 시야를 가져다 주니까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지만 그보다 값진 인적 네트워크를 얻게된 것도 큰 선물입니다.
 
지난 학기 한 교수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두가 잘 아는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야기였습니다. 나무 한 그루는 매일 소년과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그러나 소년이 성장하면서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괴로워하자 나무는 자신을 잘라 뗏목을 만들어,바다 건너 도시로 나가서 성공하라며 자신을 아낌없이 주며 행복해합니다. 하지만 멀리 떠났던 소년은 실패해서 늙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에 앉아 쉬게되고 그래도 나무는 행복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영어로 된 책은 계속되는 몸 잘라가기에도 불구하고 'but the tree was happy'가 아니라 'and the tree was happy'라고 서술돼 있다는 겁니다. 열매에 이어 가지 줄기,심지어 몸통마저 잘라가는 마지막 순간에서만큼은 당연히 'but'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작가는 끝까지 'and the tree was happy'라고 고집하고 있다는 겁니다.
 
번역하자면 'but'의 경우는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다'로,'and'의 경우는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입니다. 온몸을 다 주고도 행복했다는 문맥으로 본다면 'but'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and'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다'로 끝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but'과 'and' 의 차이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전 13:3)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but'이 아닌 'and'의 의미를 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지금은 주님 오신 성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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