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5~10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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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30일(수) 13:45

월-깨어 있으라
본문: 마가복음 13: 32-37
찬송가: 105장(구 105)
 
대림절의 첫 주일에 교회는 마지막 날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된다. 크리스마스는 몇 주 후로 다가오고 있지만 우리는 베들레헴의 그 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주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이다.
 
신학자들은 재림의 날을 '파루시아'라고 부른다. 그 날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대로 두시지 않으리라'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과 신념을 담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헬라어로 '그레고레이테'인데 '정신 차리다' '주의하다' '살아있다'는 뜻을 가진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가 이루어질 때가지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해당되는 직무가 무엇일까? 문지기이다. 그래서 종말이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은 문지기 신앙으로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그 날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깨어 있는데 지쳐있을 수도 있다. 삶이 전혀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매일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술이나 쾌락으로 세상살이의 지루함을 달래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를 위해 깨어 있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세상이 아닌 산 위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책임과 할 일을 뒤로 하고 너무 일찍 흰옷을 입고 언덕 위에 앉아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 가난과 전쟁과 기근과 같은 일에 "우리의 일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구름타고 오실 예수만 찬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 것처럼 주인이 잠시 집을 비웠을 때의 충실한 종처럼 기다린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므로 끊임없이 경각심을 가지고 집안을 항상 잘 정돈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 속에 있는 죄의 고통을 해결하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도록 남겨진 공동체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정의를 위해 일하기 위해서,평화를 위해 애쓰기 위해서,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그 주인의 돌아오심을 기다리면서,일하면서,지켜보면서,기대 속에 살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재림신앙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결혼식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신부의 기쁨이다. 가까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고 기쁨으로 기대하며 살아가는 대림절기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오늘 도처에서 일어나는 지진과 폭우 속에서도 우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엄청난 사건과 고통 속에서도 나를 세우시고 오늘에 이르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경계와 징조를 바라보면서 주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며 영원한 하늘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정선목사 / 대연교회 


화-法高創新(법고창신)
본문:마태복음 22장 34--46절
찬송가: 90장(구 98장)
 
성공의 비결을 인생의 스승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기본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이 말은 성공의 근원이 기본에 있기 때문이다.

'법고창신'이란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말로서 연암 박지원이 제자인 박제가의 초정집 서문에서 최초로 사용한 말이다. 이는 '온고지신'보다 훨씬 강한 뜻을 가진 새로운 단어였다.
 
법고만 하는 것은 옛 것을 흉내내고 본뜨면서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이고, 창신만 하면 그 정신에서 벗어나 근원을 떠나게 되기 때문에 기본에 충실할 때에만 새로운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당시의 주류 지성인들과의 논쟁이다.
 
율법 중에 큰 계명을 묻는 질문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극명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 이해는 법조문이어서 육을 섬기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율법관은 은혜와 사랑 위에 선 계명이며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 영이란 새 시대의 표징이며 구원의 실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율법관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율법에 대한 충실한 공부가 있었기에 이들의 질문에 대해 간명하게 대답하실 수 있었다. 신명기 6장 5절인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또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 중 율법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도 잘 알고 있는 신명기와 레위기 말씀을 조합하여 '온 율법과 선지자의 정신'이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법고창신'하신 것이다.
 
당시의 지성인들 중에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두 집단이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법조문에만 충실하게 매달리는 '법고'라고 한다면,사두개파 사람들은 성서의 정신을 벗어나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율법을 자유자재로 해석한 '창신'에 해당된다고 예수님은 판단하셨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의 말로 유명한 “집중하고 단순화하라”는 말처럼 기본에 가장 충실했을 때에만 새로운 정신과 가치를 찾아 자신은 물론,다른 사람들에게도 더욱 멋진 삶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질문을 오늘 현대인들에게서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서 13:10).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묵상은 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른다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법고에 해당하는 것이니 열린 마음으로 매일 그 정신을 실천하여 이웃과 함께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한다면 매일의 삶이 날마다 새로운 법고창신의 삶이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그리고 구원의 소망을 묻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대답을 주기 위해 늘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웃과 함께 사는 지혜를 얻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정덕주목사 / 한들출판사 


수-깨어지는 옹기 경고
본문: 렘 19:1-15
찬송가: 412장 (구 469장)
 
옛날에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광희문이라는 문이 있었다. 이 문을 시구문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이 문을 통하여 시체를 밖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지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사람들은 꺼려했다.
 
예루살렘 근처에도 하시드라는 문이 있었다. 이 문은 '깨어진 질그릇'이라는 뜻이 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곳에 깨어진 질그릇 조각만 버린 것이 아니라 쓰레기도 갖다 버렸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곳을 불결하게 여겼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불러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들을 불러 하시드 문어귀의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가서 예언하도록 명령하신다. 또한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에게 제사하는 곳으로 이곳을 도벳이라고도 하는데,이곳에서 자녀들을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다.
 
무엇이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식을 우상에게 불태워 바칠 만큼 잔인하게 만들었을까? 우상에게 엄청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상과 인간과의 관계는 거래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무엇을 바쳤느냐에 따라 대가가 차이가 난다고 생각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녀를 희생시키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기에 자녀를 불태운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욕심에 사로잡힌 추악함이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거래로 이루어진 사이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드리는 화려한 예배나 풍성한 헌금이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드리는 우상에 대한 번제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며 오직 주님을 사랑하기에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헌금도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감사함으로 드리는 순수한 예물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욕망으로 가득 차서 자녀를 불태우는 행위를 책망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셨다. 또한 우상 숭배로 눈이 어두워진 유다백성은 침략자에게 둘러싸이는 신세가 될 것이며 결국 먹을 것이 없어 자녀를 잡아먹게 될 것을 말씀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백성들 앞에서 토기를 던져 깨드린 것은 아무리 귀한 도자기라도 깨지면 못쓰게 되듯이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시면 버림받을 뿐임을 경고하신다.
 
오늘 우리 사회가 너무 개인의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다.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양보가 없이 자기주장만 하고 있다. 가정도 깨어지면 끝이고,국가도 망하면 끝이다.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우리에게 이기적인 욕망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불로 소멸시켜주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민준기목사 / 성심교회 


목-원수는 이렇게 갚으십시오
본문: 롬 12:14-21
찬송가: 299(구418)
 
세계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정복했던 징기스칸이 부족 간 전쟁에서 원수된 이웃 부족에게 아내를 빼앗겼다가 되찾았다. 그의 아내는 적의 씨를 잉태한 뒤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그 아이를 낳게 하여 그를 자신의 맏아들로 삼는다. 이는 징기스칸이 가지고 있었던 관용과 아량의 정신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등산을 할 때 흔히 맨 앞에 있는 산이 가장 높은 산으로 보인다. 뒤에 있는 산이 높다 하더라도 그 산은 앞에 있는 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게 보인다. 우리는 모세에게 주신 율법보다 하나님의 복음이 더 크고 높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시내산을 지나서 골고다와 비교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산이요 원수를 '이에는 이로,눈에는 눈으로' 갚는 시내산을 넘어서서 우리를 복음의 산,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오히려 대접하는 사랑의 산,골고다로 이끌고 가신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원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다. 예수님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악을 대하면서 자칫 사탄의 노림수에 걸려들어서 악에게 휘말리지 말라고 권면하신다. 나에게 악한 짓을 하는 사람과 같이 행동하면 나도 악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악을 선으로 갚는 구체적인 방법도 말씀해 주신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구약성경에 나타난 보복법을 가장 복음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이것이다.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원수를 갚으면서도 원수와 내가 서로 간에 유익을 얻는 방법이다. 복수하면서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법이다. 
 
이렇게 행할 때 우리의 원수는 머리에 쌓아 놓은 숯불로 인하여 양심의 깨달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주님 앞에 회개할 기회를 갖는다. 근본적으로 원수 갚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다(롬 12:19).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선으로 원수 갚는 것은 허용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적극적으로 권면하시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악을 선으로 갚으면서 제대로 복수하는 귀한 삶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아버지,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악을 세상적인 방법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수의 법이 아닌,복음의 법을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복음의 빛을 발하여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택현목사 / 광주서남교회 


금-희망의 전율
본문: 눅1:5-27
찬송가: 622장
 
에릭 프롬은 인간을 '희망을 품고 사는 존재요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을 '호모 에스퍼런스'라고 부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인간의 의지요,용기이며,또한 모든 불행을 치료할 수 있는 명약이 될 수 있다.
 
본문에는 사라갸 라고 하는 제사장이 등장한다. 사가랴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다. 결국 늙고 나이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을 얻게 된다. 그에게 그 아들 요한과 메시야의 탄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첫째,메시야의 탄생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임을 알려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마디로 고난의 역사였다. 7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손에 25차례나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는다. 주전 64년네 폼페이는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황폐화되었을 것이다. 아마 사가랴가 어린 소년시절 그 황폐화된 성전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버지 제사장을 보았을 것이다. 사가랴는 아마도 모든 희망을 버리고 포기하고자 하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구약시대에 그토록 약속했던 메시야의 탄생을 준비할 세례요한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둘째,요한과 메시야의 탄생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어려움과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실하게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함을 알려준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1:6)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흠이 없이 오랜 세월 메시야를 기다려 왔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나이가 많을 때까지 하나님은 마치 침묵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삶을 살아왔다.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해주신다.
 
셋째,요한과 메시야의 탄생은 우리의 충성과 소망이 헛되지 않음을 알려 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딜레마는 바로 우리의 딜레마이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그분을 믿고 남아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제 그만 단념하고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하는지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 소망과 약속을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곤경에 빠져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희망을 가지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다.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과 충성을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
 
다시 오실 주님에게 희망을 걸고 그분만을 바라보며 충성스러운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성과 소망을 가지고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려 결국 메시야를 맞이할 수 있었던 사가랴와 같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믿음과 삶으로 준비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부끄러움 없이 맞이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석호목사 / 동춘교회 


토-다 내게로 오라
본문: 마태복음11:25-30
찬송가:528장(구318장)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다.
 
첫째,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다.
 
남녀노소,빈부귀천,혈통,국경,이념,좌파,우파,진보,보수 상관이 없다. 이 세상의 누구도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행복이요 멀리하면 불행하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가까이 가는 것이 축복이다. 이 축복은 영원불변이다. 이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지만 우리 주님의 은혜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절대로 변하지 않은 은혜를 누리는 것은 성도의 축복이다. 성도는 변함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 영원한 은혜, 변함없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주님께로 다 나아가야 한다.
 
둘째로 예수님께 가면 소망이 있다.
 
미네소타대학 연구진에 의하면 미국 십대 청소년들중 약 15%가 35세 이전에 죽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하여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예수님께 가야한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소망의 찬송이 나오게 된다. 불안하니 삶이 곤고하다. 이러한 짐을 진 사람들은 피곤에 지치고 고통에 쓰러진다. 비틀거리는 인생을 살아간다. 유리방황하는 삶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영원한 안식을 뜻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해소와 평강과 안심까지 주신다. 비로소 인생의 방황이 그치고 소망을 얻게 된다.
 
셋째로 예수님께 가면 쉼이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참된 안식과 쉼을 누리게 된다. 여기에서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가야하고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워야 한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멜 때 즐거움이 있다. 주님께 배울 때 세상이 달라진다. 각박한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원망과 불평이 감사로 변한다. 교만이 겸손으로 변한다. 증오가 사랑으로 변한다. 죽을 맛이 나던 세상이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으니 비로소 쉼이 오게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죄의 짐이다. 지긋지긋한 세상 염려와 근심의 짐이다. 율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망 권세의 짐이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다. 주님 앞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음에 쉼을 얻는 은혜를 누리자
 
<오늘의 기도>
아버지 하나님 나같이 낮고 천한 죄인을 부르시고 용서하여주시고 쉼을 얻게 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새 삶을 얻었으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영원토록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찬양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이웃을 사랑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석금목사 / 소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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