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물

[ 데스크창 ]

안홍철 기자 hcahn@pckworld.com
2011년 11월 24일(목) 17:24
오스카 와일드가 쓴 '행복한 왕자'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남쪽을 향하던 제비 한 마리가 행복한 왕자의 동상에서 쉬는 순간 왕자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살아있을 때 불행을 몰랐던 왕자는 죽어 동상이 되어 높은 곳에 자리잡게 되자 세상의 온갖 슬픈 일을 목격, 눈물을 흘리게 된거죠. 왕자는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의 몸을 치장한 많은 보석을 떼내어 그들에게 나눠주게 합니다. 제비는 왕자의 보석을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주다가 떠날 시기를 놓쳐 동상 밑에서 얼어 죽게됩니다. 봄이 오자 마을 사람은 한때 마을의 자랑거리였던 왕자 동상이 흉물스러운 쇠붙이로 몰락하자, 녹여버립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하나님이 제비와 왕자를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게 했다는, 영국사회의 물질주의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작품입니다.
 
아직 철이 없어서일까요? 몇 십년 만에 이 단편을 다시 읽으면서 왕자의 눈물을 생각하자 저도 눈물이 주룩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신 적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은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자(요 11:33)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마리아의 눈물은 헬라어로 '클라이우산'('클라이오'의 현재분사 여성단수 목적격)이며 예수님의 눈물은 '에다크뤼센'('다크루오'의 3인칭 단수 제1과거)으로 전혀 다른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우연이 아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두 동사를 이용하여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전해주고자 했다는 것이죠. 35절의 '눈물 흘리다'(다크루오) 동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요한복음 저자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결부시키고 있다는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다크루오'는 바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크루오'는 일반적으로 눈물 흘리는 동사 '클라이오'와 중요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크루오'는 정말 고통을 참다 참다 못참고 절규하듯 우는 울음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고통의 순간에 우는 울음이라고 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선교여행에서 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다크루오)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8~19) 바울은 하나님을 전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 눈물을 통해 알리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절규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는 이 과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도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다크루오)로 씻으며 입맞추며, 향유를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눅 7:38, 44). 그러나 우리는 이 절규하며 애통하는 상황 속에서도 너무나 고귀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로마 황제에 의해 고통받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눈물(다크루오)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주님, 감사합니다. 그저 '아멘'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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