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1백주년 선교하는 교회 전통 수립,효율적이고 일관성 있는 선교가 과제

[ 총회1백주년 ] 총회창립 1백주년 선교적 의미

변창욱교수 ksj@pckworld.com
2011년 10월 27일(목) 14:09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이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지 28년이 경과한 1912년 9월 1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장로교회는 몇 차례 분열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총회창립 1백주년을 앞둔 지금 본교단 총회 선교부는 1913년 3명의 선교사를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중국 산동에 파송한 이후 2011년 10월 현재 세계 85개국에 6백68가정, 1천2백38명의 선교사를 보내고 있다. 본 글에서는 총회창립 당시의 선교적 전통과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총회 창립과 더불어 선교하는 교회의 전통을 수립

본교단은 총회를 창립하면서 이를 감사하며 그 기념사업으로 해외선교사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본교단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출범하였다. 1912년 총회 회의록을 보면 "1907년 로회를 시작할 때에 졔쥬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에 깃븜이 충만한 바이온즉 지금 1912년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전도를 시작하되 지나(支那 - 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청원하오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총회창립과 더불어 매년 추수감사일을 선교주일로 지켜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와 연보를 하도록 하고 추수감사주일 헌금을 총회로 보내어 해외선교비로 사용하도록 했다. 1913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3명의 목사 가정을 최초의 해외(타문화권) 선교사로 중국 산동성에 파송하였다. 1913년부터 시작된 본교단의 중국 산동선교는 1957년 방지일목사가 중국에서 공산당에 의해 추방당할 때까지 40여 년간 지속적으로 수행되었다.

총회가 창립되면서 선교사를 보낸 사건은 그 해에만 일어났던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었다.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면서 7명의 한국인 목사 가운데 1명인 이기풍선교사를 제주도에 파송하였고, 1909년 최관흘목사를 러시아 연해주에 그리고 한석진목사를 일본 동경으로 파송하였고, 1910년 김영제 김진근목사를 만주 간도로 파송하여 동포들을 돌보았다. 이처럼 본교단은 총회창립 이전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13년 중국 산동선교사 파송이 이루어졌다.

2.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교하는 교회의 전통을 수립

1912년 총회창립 당시 장로교 교세는 7개 노회에 예배처소 2천54개, 목사 1백28명, 장로 2백25명, 세례교인 5만3천8명, 전체교인 12만7천2백28명이었다. 급성장하는 여러 교회와 예배처소를 돌보며 12만여 명의 성도를 목양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국내 전도에 전력하기에도 힘든 상황인데다가 국외적으로는 국권을 침탈당한 어려운 때였다. 하지만 본교단 총회는 눈앞의 현실에만 급급하기보다 예수님의 선교명령에 순종하여 해외선교를 시작함으로써 선교적 교회의 전통을 세웠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피선교국에서 선교국으로 바뀌었고 국토와 주권은 상실하였지만 한국교회는 건재하다는 것을 세계와 한국교인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 파송을 위해 힘쓴 총회 전도국 위원장인 길선주목사는 선교사 파송의 의미에 대해 "한국교회가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에 겨운 일이다. 그러나 나라를 잃었을망정 국외에 선교하는 세계선교국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가장 의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복음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의무인 동시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에 순응하는 믿음의 실천이다. 우리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최대의 힘을 다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총회의 선교정신에 공감하여 당시 본교단의 모든 교회들이 산동 선교에 기도와 물질로 참여하였다. 매년 부활절 헌금은 총회로 보내어 국내 전도를 위해 쓰고 추수감사절 헌금은 해외선교비로 사용했으며, 여전도회와 기독교학교의 어린 학생들도 선교를 위해 헌금하는 등 중국 산동선교는 본교단의 총체적 선교 동력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3. 선교지 교회와 협의를 통한 협력선교의 전통을 수립

본교단은 산동선교를 통해 건강한 선교모범을 제시하였다. 첫째, 일방적인 선교가 아니라 중국교회 뿐 아니라 재중(在中) 재한(在韓)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협의를 거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은 중국교회에 소속되어 일함으로써 현지교회와 무관한 선교가 아니라 현지교회의 필요를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선교동역자로서 섬겼고, 교회개척도 한국의 교파교회나 지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교단교회를 설립했다. 이로써 선교사가 철수하더라도 교회는 계속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이는 1956년 해방 이후 총회가 해외선교를 재개하면서 파송한 최찬영 김순일선교사를 통해 태국교회와의 협력 전통으로 계속 이어졌다.

둘째, 개교회가 아닌 총회차원에서 검증된 목회자를 선교사로 선발하여 파송하였다. 예컨대 첫 선교사로 나간 박태로목사는 당시 성도 1천명의 재령교회를 담임하던 한국 최초의 위임목사였고, 마지막 중국 선교사 방지일목사는 미국유학을 위해 비자를 받아둔 상황에서 총회의 부름에 순종하여 부친을 이어 2대째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또한 산동선교는 일체의 외국선교부 지원없이 본교단 모든 교회의 감사주일헌금으로 추진되었다.

셋째, 총회파송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에 적용되어 성공을 거둔 네비우스(John Nevius)의 자립 선교원리에 따라 자립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교회건축, 교역자 사례비, 학교운영 등 상당한 재정을 중국교회가 감당하도록 하였고, 현지인들을 양성하여 스스로 교회를 지도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을 소개하여 중국교인들에게 주일성수, 새벽기도회, 주일밤 예배, 삼일밤 기도회, 사경회, 개인전도, 주일헌금, 성경공부 등을 소개하고 정착시켰다.

4. 총회 창립 1백년의 선교적 교훈과 과제

중국은 우리보다 80여 년 앞선 1807년에 개신교가 들어왔고, 총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은 약소국가요 주권도 잃은 나라인데 2천만의 조선이 4억의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중국 교회로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1913년 한국교회의 중국 선교사 파송에 대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클락(곽안련, Charles A. Clark)은 "1912년 총회 창립을 기념하여 전국 교회는 대연보를 거출하여 3인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는 조선교회가 선교 받은 지 28년 밖에 안 된 때였다. 실로 세계에 유(類)가 없는 경이적 사실"이라며 감탄하였다.

중국 산동선교는 본교단이 처음으로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었기에 초기에 시행착오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첫번째 총회가 선교하는 총회가 됨으로써 한국교회가 선교를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지난 세기에 세계선교의 책임을 감당해오던 서구교회의 약화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선교적 책임과 사명은 더 커가고 있다. 창립총회때부터 교단의 선교정책에 따라 해외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온 지역교회들은 이제 개교회 중심에서 벗어나 본교단 협력선교의 아름다운 전통과 교훈을 잘 되새겨 선교지에서 보다 효율적이며 일관성 있는 선교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변창욱교수/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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