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총회 창립,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의거요 성사'

[ 총회1백주년 ] 세계교회와 연대ㆍ성장하는 계기 마련, 조직 교단으로서의 면모 갖춰

윤경로 교수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10월 19일(수) 14:51

지금부터 꼭 99년 전인 1912년 9월 1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에서 창립되었다. 따라서 내년 9월이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백주년을 맞는다. 총회 창립 1백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행사를 1년 앞두고 99년 전 총회창립 때의 모습을 회고하며 그것이 지니는 역사성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다 할 것이다.

우선 총회가 창립되던 1912년 그해의 장로교 교세는 목사 1백28명, 장로 2백25명, 교인 12만7천2백28명, 예배처소 2천54개에 이르렀다. 1907년 독노회가 결성된 이후 꾸준히 교세를 확장시켜 총회를 조직할만한 상당한 교세를 확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총회 창립은 1년 전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1911년에 열린 제5회 예수교장로회 조선노회(독노회)에서 '내년에 총회로 모힐 일'이란 결의에 따라 1년 동안 총회 조직을 위해 먼저 7대리회를 7노회로 승격시키는 작업을 선행시켰다. 이에 따라 1911년 10월 15일 전라노회 결성을 시작으로 경기충청노회(1911.12.4), 황해노회(1911.12.8), 경상노회(1912.1.6), 남평안노회(1912.1.28), 북평안노회(1912.2.15), 함경노회(1912.2.20) 등 7노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은 평양 경창문 안 여성경학원에서 1912년 9월 1일 오전 10시 30분 창립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이 창립예배에서 독노회 회장이었던 레이놀즈(W.D.Reynolds) 목사가 히브리서 12장 말씀을 중심으로 '장자회'(長子會)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었고, 이어 마펫(S.A. Maffett) 목사와 언더우드(H.G. Underwood) 목사의 축사와 성찬식 집례가 있었다. 개회예배를 마친 후 정회시간을 가진 후 오후에 5천 명 이상의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평북 선천교회 김석창목사의 설교가 있은 후 참석자 전원이 참가한 뜨거운 기도회를 가진 후 첫날 총회 창립예배를 모두 마쳤다.

총회창립에 따른 본격적인 회무는 다음날 곧 9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 서문 밖 장로회신학교에서 진행되었다. 회무 첫날인 9월 2일에는 레이놀즈 목사의 강론과 박예현목사의 기도가 있은 후 총회창립 취지 설명이 있었다.

이어 참석회원을 조명하니 목사가 96명(선교사 44명, 한국인 목사 52명)이고 장로는 1백25명으로 모두 2백21명에 이르렀다. 이때 참석한 선교사, 목사는 곽안련, 밀의두, 원두우선교사를 비롯해 한국인 목사 서경조, 도서원, 박정찬, 국유치, 한석진 목사와 장로로 함태영, 이여한, 이원긍, 박승봉, 김규식, 박태선, 차상진, 김인수, 배운선, 정윤수, 류성칠 장로 등이 총대로 참석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창립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교회의 한 회원이 되었다. 따라서 만국장로회연합총회(현 세계개혁교회연맹)로부터 총회창립을 축하하는 문안과 축사의 편지가 답지했고, 미국북장로회총회도 언더우드를 통해 축사를 전해왔다.

이밖에도 미국뉴욕전도총회와 중국 산동성 노회와 관동교회, 일본의 교회에서도 축하 편지를 보내왔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교회와 연대하며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당시 정황을 기록한 장로회사기(長老會史記)에 따르면 아직 총회를 조직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회의하는 자'도 있었지만 4개 선교부가 합동하여 하나의 총회를 조직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의거요 성사'라고 총회창립을 높게 평가하였다.

첫 총회에서 선임된 임원은 회장 언더우드(H.G.Underwood) 목사, 부회장 평양의 길선주목사, 서기 서울의 한석진목사, 부서기 군산의 김필수목사, 회계 블레어(W.N.Blair) 선교사, 부회계 선천의 김석창목사였다. 지방별 7개 노회가 연합하여 총회를 조직함으로 임원 선정에서도 지역 안배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초대 회장 언더우드는 취임 설교에서 세 가지를 힘주어 피력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와 신자, 그리고 신자와 신자 사이는 늘 연합되어야 하며, 둘째, 이 악한 세상에 우리 믿는 자의 행위로 그리스도의 존재를 드러낼 것과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쓴 잔을 받으신 것 같이 우리 믿는 자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드릴 각오와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비장한 내용의 설교를 했다. 장차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한국 교회가 당할 고난과 환난을 미리 예견하듯 예언자적인 설교를 해 듣는 이들에게 큰 감동과 감명을 주었다.

첫 노회에서 사회봉 '고퇴'가 제조되었듯이 첫 총회에서도 고퇴가 만들어졌다. 곧 일곱 노회가 하나의 연합된 몸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해 일곱 가지 색깔의 나무에 삼위일체를 상징해서 세 띠를 둘렀으며 십자가 위에 서 있는 반석같은 교회를 생각해서 견고한 나무로 제조한 것이다.

한편 총회 창립을 기념하며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해외 선교의 문을 열었다. 노회를 조직할 때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기쁨이 충만했듯이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해외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총회는 선교지를 중국 산동성 행양현과 내양현으로 확정하고 1913년 11월 첫 선교사로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등 세 목사를 파송하기로 했다. 이로써 한국 교회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이방지역에 대한 해외선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총회 창립으로 한국 장로교회는 명실상부한 조직 교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선교사 주도의 교회 성격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총회 회장과 회계를 선교사가 맡아 사실상 교회 운영권이 외국인 선교사에게 있었으며 선교사의 임면직에 관한 권한도 아직은 총회가 갖지 못했다. 총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외국인 선교사들은 치외법권적 특별 대우를 받고 있었던 점도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는 예라 할 것이다.

내년 9월이면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창립 1백주년이란 역사적 해를 맞이한다. 1백년 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지녔던 그 순수한 믿음과 열정 그리고 헌신을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떻게 이를 계승 발전하여 내일의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키워낼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며 기도할 때라 할 것이다.

윤경로 교수/한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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