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훈련장

[ 목양칼럼 ]

김의식목사
2011년 10월 11일(화) 18:46
노량진교회 림인식목사님 밑에서의 목회는 한 마디로 천국 생활이었다. 아버지 같은 림 목사님이 계셨고 형, 누나 같은 선배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있었다. 또한 사랑으로 잘 섬겨주신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그리고 교회학교 교사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6년 동안의 목회 훈련을 잘 받고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 유학생활과 이민 목회는 한 마디로 광야의 훈련장이었다. 고향 산천,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교인들을 떠난 정신적인 외로움이 무엇보다 컸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그래서 학교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했다. 그런데 젊은 신학생들이 식사가 끝나고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는데 그 앞에 가서 접시들을 거둬 와서 접시를 닦을 때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렇게 마음이 상해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접시 닦는 것이 그렇게 자존심 상해? 한국에 있는 교인들은 너와 비교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도 다 참고 이겨내는데…'

그 뿐만 아니라 영어로 공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공부하기도 힘든데 영어로 석사, 박사과정을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석사, 박사 과정에서 목회상담학과 가족치료학을 전공했는데 병원에 가서 상담 실습을 해야 했기에 영어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부만 해도 힘든데 이민 목회까지 해야 했으니 더욱 더 힘들 수밖에.

무엇보다도 이민자들에게는 마음의 상처들이 많았다. 이역만리 타향 땅에서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환경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도 그 상처의 아픔을 풀 데가 없으니까 교회에 와서 그것들을 다 쏟아 놓았다. 그러다 보니까 이민교회는 평안할 날이 없었다.

이민 목회는 한 마디로 광야의 훈련장이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만이 위로가 되셨고 새벽 기도회가 가장 큰 피난처였다. 새벽 제단에서 말씀과 기도로 힘을 얻었기에 광야의 연단의 세월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7배나 부흥하였고 조그만 대학을 리모델링한 후 입당하였다. 그리고 은혜 가운데 5년 4개월의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의 목회를 잘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다. 만일 이민 목회의 연단이 없었다면 오늘의 필자도, 화곡동교회 목회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은 광야의 훈련장이다. 상황과 배경만 다를 뿐 우리는 수많은 광야의 훈련을 받으며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이 광야의 훈련 후 정금 같은 믿음으로 나아올 수 있다면 모든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복되게 할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늘의 상과 면류관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

김의식 / 목사 ㆍ 화곡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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