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쓴 물에 던져진 한 나무

[ 목양칼럼 ]

조건회목사
2011년 09월 06일(화) 16:05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홍해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길을 간 후에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한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니 한 나무를 던지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마라의 쓴 물에 던져진 한 나무가 영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진정 인생의 쓰라린 문제들이 고쳐지고 치료되고 단 맛을 낼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라는 것이다. 내 심령의 한 복판에 예수의 십자가를 세우라는 것이다. 나를 향해 고통 당하신 그 손 못자국을 만지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달리신 나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무는 우리의 죄와 고통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자신을 말한다.

고통의 마라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붙들라는 것의 의미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라는 것이다. 찬송가 455장 1절 가사를 보면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가 있다. 십자가에서 내 짐을 풀 수 있다는 그 말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통을 깊이 묵상하게 될 때에 내 고통은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짐이 사라지기보다는 그 짐들을 가볍게 지고 가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 자매의 고백처럼 말이다. "주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면 내 고통이 가벼워진다. 주 예수의 찔리신 가시면류관을 생각하면 내 육체의 가시가 가벼워진다." 고통스런 마라의 현장에서 나를 위해 고통당하신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보자. 그 고통은 가벼워질 것이다.

성지순례 가서 겟세마네동산에 방문했는데, 그 동산에 굉장히 오래된 올리브 나무 하나가 눈에 띄였다. 가이드 하던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그 나무의 정확한 수령을 알 수 없지만, 전문가들에 의하면 거의 2천년 가깝게 된 나무라고 한다. '만약 그 나무가 2천년이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던 장면과 모든 인류를 위해서 아무 저항 없이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당하신 것을 목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런데 더 큰 감동이 밀려왔던 것은 그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철제 펜스에 매달려 있는 조그만 판에 쓰여진 한 문구를 읽고 나서였다. "My Father, I do not understand you, but I trust you.(아버지,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야할 십자가의 길이 이해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예수님은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셨다.

어거스틴은 인생의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고통이란 수를 놓은 천의 뒷면을 보는 것과 같다." 천의 뒷면을 보면 많은 색실이 무질서하게 얽혀 있어 보기에 아름답지 않다. 심지어 흉측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천의 앞면을 보면 혼란스럽던 실들의 형태와 색채가 아름답게 조화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처럼 고난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러므로 고통을 다만 괴로움이나 부조리로만 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를 믿는 사람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신 예수님처럼 현재의 고통이나 어려운 여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뒷면에 준비하고 계신 아름다운 내일을 바라보는 것다. 고난이라고 하는 현실만 보느냐, 아니면 그 배후에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는 것이다.

조건회목사 / 예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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