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김종우선교사의 남수단 방문기

[ 선교 ]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1년 08월 23일(화) 19:27

   
▲ 남수단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한 김종우선교사(가운데).

남수단(Republic of South Sudan)에 대한 각국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우간다 김종우선교사가 현지 도시들을 방문했다. 모든민족선교회(KEMAN)의 후원을 통해 우간다에서 신학교 사역을 전개하고 있는 그는 이번 방문에서 졸업생들의 사역지를 중심으로 3개 도시를 돌아봤다.


김종우
총회파송 우간다 선교사

지난 4일 새벽 5시 30분 우간다를 출발해 북쪽을 차를 몰았다. 나일강을 건너 비포장 길을 달리니 오후 4시경에 국경에 도착했다. 전에는 허름했던 수단 국경 사무소와 태양열 전기시설이 새롭게 단장돼 있었다. 무엇보다 직원들과 사람들의 표정이 매우 밝았으며, 평화를 만끽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에는 아주 긴장돼 있었고, 항상 경계의 눈초리로 방문객을 쳐다봤다.
 
지난 40여 년 동안 처참한 전쟁과 난민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유와 평화를 맛보게 된 것이다.
 
6시 넘어 첫 방문지인 모로보(Morobo)에 도착했다. 마치 예루살렘성에 예수님의 입성이듯 성도들 수십명이 나뭇잎을 바닥에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뜨거운 찬양 속에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감사와 미안함이 교차한다.
 
지난번 방문했을 땐 겨우 초가집 몇 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여러채의 양철지붕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유치원은 비바람에 진흙벽이 무너져 있었고, 어린이는 많은데 교실이 부족해 나무 아래서 공부하는 모습도 보였다. 교실에는 작은 통나무를 이어 놓은 의자가 있었다.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세미나를 가졌는데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려는 모습에 목이 메였다. 그들은 한국전쟁 이야기와 전후 한국의 재건 및 교회 부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오랜 가뭄에 물을 만난듯 교회의 부흥을 열망하고 있었다. 기도도 찬양도 크게 못하던 지난번과는 대조적으로 마음껏 웃으며 기쁨의 춤으로 독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현지인 목사 한 분이 비어있는 건물 한 곳을 보여준다. 집 중에 제일 깨끗하고 좋아 보였다. 그리고 이곳은 앞으로 올 선교사의 사택이란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간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준비하고 있었다.
 
6일 오전 인근에서 일하던 농부 두명이 밭의 지뢰를 건드려 목숨을 잃는 사고가 터 졌다. 우리 일행도 폭발음을 들었다. 현지인 목회자가 "지난번 교회 옆으로 길을 만들 때 6개의 폭탄을 발견했는데 하나도 터지지 않았다"며 "주님의 특별한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이 지역은 한때 큰 무역도시였는데 수단 정부의 폭격으로 초토화됐고 사람들도 흩어졌다고 한다. 이제 그들이 다시 돌아와 황량한 벌판에 초가집을 지으며 재건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상당수기 과부와 고아들이다.
 
다음날 두번째 방문지인 예이(Yei)라는 곳에 도착했다. 제2의 도시로 알려진 이곳엔 마침 큰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관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곳곳에 독립을 축하하는 큰 간판들이 세워져 있다. 건물과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며 제대로된 도시의 무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도로는 비포장 상태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 두 명이 교회를 섬기며, 내년에 초등학교를 확장하기 위해 준비중이었다. 이 교회는 이미 5백여 명의 중학생과 1백여 명의 초등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중학생들은 흙집을, 초등학생은 나무 기둥과 흙벽으로 만들어진 교회를 교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시 종착지인 수도 주바(Juba)로 향했다. 약 1백60㎞의 험한 진흙길을 3시간 반 정도 달렸다. 도로 곳곳에 전쟁과 사고로 파손된채 버려진 차들이 보였다. 또한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도로를 벗어나지 마시오'라는 경고 간판도 세워져 있었다. 전쟁 중에 묻은 지뢰가 아직 다 제거되지 않아 위험하다는 표시였다.
 
지난번 방문 때에는 더위가 심했는데 이번에는 비도 오고 선선했다.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엄청난 변화에 놀랐다. 도로가 넓게 포장됐고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수많은 가게들이 물건을 진열해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중국인, 케냐인, 우간다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는 국제 도시로 변해 있었고, 그들은 이곳에서 많은 수익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지 교회 사역자와 적십자가 운영하는 한 장애인 재활기관을 방문했다. 의족, 의수를 만들어 달아주는 곳이었다. 의사들은 환자를 운송해 올 차량이 없어 지역민들만 돕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거리에는 전쟁 중 팔이나 다리를 잃은 노인, 젊은이, 여성, 아이들이 즐비했다.
 
일행이 머문 곳은 한 교회 지도자의 사택이었다. 매우 허술한 집이었지만 정성스러운 환대에 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4명의 아들을 잃었다는 그의 고백 앞에선 눈물을 흘려야 했다.
 
시내에는 가톨릭 성당 한 곳이 보일뿐 교회들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주바시 초입에는 큰 성곽처럼 생긴 여호와증인의 본부가 있었다. 교육기관이 턱없이 부족하고 허술해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녀를 우간다나 케냐로 보내고 있었다. 병원시설도 매우 열악했다.
 
남수단은 이제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곳이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현지 기독교 리더들을 통해 국가의 기반이 잘 세워지고 안정을 찾아가기를 기도한다. 무엇보다 교회의 재건과 영적인 부흥이 절실해 보인다. 현지인들은 한국인들의 경험을 나누기를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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