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은혜 충만

[ 나의삶나의신앙 ] <나의삶나의신앙> 계준혁장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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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8월 10일(수) 11:46

   
▲ 계준혁장로의 중학교 시절 가족사진(1942년). 앞줄 맨 오른쪽이 계 장로.
계준혁
염천교회 원로장로
장로교육원 명예이사장

지난 5월 어느날. 여느 때와 똑같은 평온한 아침이었다. 차를 타고 아내와 함께 종로의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입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차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급발진을 해 건물 기둥을 향해 돌진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 쓸 겨를이 없었다. 짧은 거리였지만 충격은 상당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병원 신세를 졌고 퇴원 후에도 통원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만약 가까운 기둥이 아니라 조금 더 먼 지점의 물체에 충돌했다면 아마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운 아찔한 사고였다.
 
불운이었지만 어차피 발생한 사고,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세달여가 지난 지금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이번 사고를 통해 인생에 대해, 신앙에 대해, 앞으로 얼마가 될 지 모르지만 남아있는 나의 생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인생을 뒤돌아보면 '감사'와 '은혜', 두 단어만 남는다. 얼마 전 기독공보의 요청으로 그 감사와 은혜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내 유년기의 기억을 떠올리면 먼저 광활한 만주 벌판이 눈 앞에 펼쳐진다.
 
나는 1927년 중국 만주에서 태어났다. 내가 만주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권을 잃은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과 선친의 투철한 애국심 때문이었다.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선친은 모든 친척들을 거느리고 중국 만주로 올라가 독립운동을 하셨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 오지에서 거주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 중국 아이들과 어울려 지냈다. 아버지는 심양의 만융퉁이라는 곳에 농장을 크게 확장시켜 중국으로 건너온 많은 한국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하셨다.
 
독립운동을 하시던 선친은 옥고도 두번이나 치르실 정도로 신변의 위험을 많이 당하셨기 때문에 신분보장을 위해 잠시 중국으로 귀화하신 적도 있었다. 교회의 장로이셨던 아버지는 신앙심도 투철하셨다. 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위해 동북 만주일대를 전전하셔서 가정의 일은 거의 어머니가 맡으셨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나에게 성경 인물 중 특히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해주셨고, 한국 역사책 읽기를 독려하셨다.
 
나는 당시 심양에서 서탑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 당시에도 어린이들을 위한 여름성경학교가 있었는데 수료식에서 "1등 계준혁"이라고 발표하시던 선생님의 목소리에 "내가 왜 1등이지?"하며 의아해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심양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고향인 평북 선천에 좋은 학교가 있다며 그곳으로 유학을 보냈다. 신성중학교라는 미션스쿨이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조국은 이미 일제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공부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당시는 일본 강점 말기로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군사를 충원해야 했던 일본은 우리나라에서도 학병을 모집한다는 명목 하에 강제적으로 학생들을 징집하다시피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부모님은 아들 걱정에 밤잠을 설치셨다. 결국 4학년 때 할 수 없이 학교를 휴학하고 심양으로 다시 들어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야 나는 졸업장을 받으러 평북 선천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우리나라는 평화롭지 못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사이에서 국민들간 크고 작은 갈등들이 많이 일어났다. 신성학교로 졸업장을 받으러 간 사이 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신의주반공학생사건이 발생했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은 1945년 11월 23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치며 벌인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이다. 11월 18일 용암포 제일교회에서 소련군과 조선 공산당의 실정과 횡포를 비난하는 시민위원회 주관의 '인민위원회 지지대회'가 열린 뒤, 공산당이 경금속 공장직공을 동원해 이를 점거하고 간부들을 폭행한 데서 비롯됐는데 이에 분격한 신의주 학생자치제 대표들과 학생들은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전개한데 이어, 23일 신의주의 6개 중학교와 부근의 5천여 명의 학생과 함께 궐기해 공산당 본부, 인민위원회 본부, 보안서 등을 점거했다. 이에 공산당의 보안대와 소련군이 무력으로 대응해 23명이 사망했고 1천여 명이 검거되는 큰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 후 한밤 중에 갑자기 보위부에서 들이닥쳐 잠자고 있던 나를 잡아갔다. 당시 신성학교에서는 내가 학생운동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도 높은 조사 끝에 무혐의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는 자신의 자녀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정리=표현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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