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아,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6월 23일(목) 11:30

오늘날 우리를 참으로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사실과 그 가운데 젊은이와 노년층의 자살이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청년과 청소년의 자살이 단순히 믿지 않는 비신자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이은주, 정다빈, 최진실, 최진영 등의 연예인 자살을 통하여 알 수 있듯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도 이 문제만큼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심각한 자살 문제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그리고 젊은 세대에서 겉잡을 수 없이 증가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그리 간단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와는 달리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 특히 그들의 생애를 통하여 그리 고난을 깊이 경험하지 못한  청년과 청소년들이 이 복잡하고 힘겨운 사회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또 그러한 힘의 바탕이 되는 정신이 너무나 유약하다는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청년들이 단순히 고난을 경험하지 못해서, 또는 그들의 삶의 바탕이 되는 인생의 철학이 유약해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고 하기에는 논리가 부족하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자아존중의 부재라고 진단하고 싶다. 실제로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살에 이르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존중감이 낮으면 낮을수록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할 확률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교회교육의 맹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우리 인간의 존중감,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Image of God)을 소유한 자요, 하나님의 창조의 극치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로마서 8장 29절과 3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pre-know), 우리를 선택하시고(pre-destine), 우리를 부르시고(calling),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justify), 우리를 영화롭게(glorify) 하셨다고 하였다.

인간은 이처럼 존귀한 존재요 보배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그러나 문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주의 성도들이나 청년들이 이렇게 존귀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오늘의 문화가 이렇게 거룩한 자아의 존중감을 왜곡시켜 인간을 너무나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아존재감의 의도적 상실로부터 오는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존재감을 상실하고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청년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외침은 이러하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겔16:6).

그렇다.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 특히 자아의 존중감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아가는 주의 청년들에 대한 외침은 뜨겁다. 아무리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 자살할 위기에 있다 하더라도 '피투성이라도 살아라'고 외치는 주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힘을 얻어 힘차게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청년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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