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부터 대한YWCA 회장까지...

[ 나의삶나의신앙 ] 주선애교수의 인생 이야기(3) "여성운동에 매진 했던 행복했던 시간들"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1년 06월 22일(수) 09:21

주님을 만난 뒤부터 무엇이나 나에게 요청해 오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순종하겠다고 기도했다. 주변 사람들은 왜 'NO'라고 하지 못해 늘 고생 하느냐고 핀잔하지만 난 주님과의 약속을 어길수가 없기 때문에 일정이 겹치지 않는 이상 여러 요청들을 수락해 왔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총회의 결의에 따라 여전도사들을 교육할 수 있는 초급대학 과정을 개설하는 일을 맡겨졌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 일을 위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 자료를 조사하면서 난 한국교회 여성사에 대한 큰 호기심을 갖게 됐다.
 
1978년이었던가. 창립 5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던 여전도회 전국연합회가 마침 '장로교 여성사'를 출판하기로 결정하고 나에게 집필을 맡겼다. 하겠다고 말하고 나니 남아있는 기간이 고작 1년 뿐이었다. 게다가 교회여성들에 대한 자료라는 것이 전무했기 때문에 난 생존해 계신 어른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육성을 받아 적었다. 당시에 학교에서 집까지 통근하는데만 3시간이나 걸렸고, 대학부 학부장과 기독교교육과 과장까지 맡아 눈코뜰새가 없었다. 사정이 이러니 장로교 여성사를 쓰는 것자체가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은혜 중에 부족하지만 책을 완성해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희년 총회에 배부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 일을 통해 난 위대한 여성 지도자들의 삶을 엿보았고, 더불어 한국교회 여성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깨닫게됐다.
 
1980년도에 들어서면서 초교파적으로 여신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조직이 바로 여신학자협의회였다. 초대회장으로 섬겼고 '한국교회사 측면에서 본 여성신학'이라는 논문도 쓰면서 애정을 가졌지만 급속도로 밀려오는 해방신학의 사조를 보면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나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앙과는 상반됐던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서 교회 여성의 의식을 바꿔 주고 지도력을 갖게 해 주면 우리 민족 중흥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신념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됐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바로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여성 지도자 교육원'이었다. 교육원은 상상 외로 반응이 너무 좋았다. 특히 여기서 공부한 여성들이 중단되었던 학구열이 되살아나 신대원에 입학해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결실도 맺어졌다. 교회현장으로 나가 상담을 하고 더욱 열심히 봉사를 하는 이들은 부지기수였다. 지금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를 통해 '계속교육원'으로 이어지면서 여성지도력들이 배출되고 있는 걸 보면 늘 감사할 뿐이다.
 
늘 마음 속에 남는 추억은 1958년부터 2년 동안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전국의 선교여성을 섬긴 일이었다.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로 여전도회를 섬기면서 참으로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그때의 경험이 이후에 날 대한YWCA 회장 등으로 이끈 동력이 됐다. YWCA 회장을 지내면서 펼쳤던 '바른 삶 실천 운동'을 통해 밝은 가정 만들기와 절제생활, 퇴폐ㆍ향락문화 바로잡기 운동은 급속도로 발전했던 한국사회에 작은 경종을 울렸다고 믿는다.
 
아흔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믿는다.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여성들의 건강한 지도력이 점점 더 커져야 하며, 또 커질 것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늘어나길 바라고 사회도 바른 길을 향해 갈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11살이 돼 나처럼 늙고 병든 강아지 밀레와 함께 보내는 노년의 평범한 일상, 하지만 난 늘 변화를 꿈꾸며 조용히 기도한다. '주여,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주선애

정리:장창일차장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