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육의 여명기, 그 텃밭을 일구다

[ 나의삶나의신앙 ] 주선애교수의 삶 두번째 이야기, 한국 기독교교육의 개척자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1년 06월 22일(수) 09:18

나의 꿈은 본래 일본의 동경여자사범대학이나 서울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진학하는 것이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며 극구 말리시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마침 1946년 평양신학교에 여자 신학부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 난 주저없이 입학을 했다. 물론 교역자가 되겠다는 소명보다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런 내가 기독교교육을 전공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독교교육과를 세우는데 일조하게된 것은 결국 주님의 은혜였다.
 
나와 기독교육의 만남이라.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박형룡교수님이 "미국에서 보니 종교교육이라는 게 있더라. 이미 미국엔 여교수도 있던데. 한번 공부해 보면 어떻겠나?"라고 제안하셨다. 하지만 교수님의 제안을 고민해볼 겨를도 없이 갑자기 전쟁이 터지고 만다. 난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고 우여곡절 끝에 대구에 도착한다. 난 거기서 우연한 기회에 대구고아원의 원장이 된다. 내 나이 29살. 너무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거친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시작했던 기도운동을 통해 아이들이 하나, 둘씩 변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아, 이것이 교육의 힘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되던 즈음, 이상근목사님도 기독교교육을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더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고아원을 다른 분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유학준비를 시작했다.
 
이런 과정 끝에 뉴욕신학교에 입성한 것이 1956년. 졸업 후 난 뉴욕대학교 교육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 모든 과정을 수료했다. 당시 논문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지만 기독교교육이 태동하던 시절, 당장이라도 교수요원이 필요했던 국내의 대학들로부터 서둘러 귀국해 달라는 요청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귀국한 뒤 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만큼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다. 당장 우리 총회는 서울여자대학교를 설립하는 일을 맡겼고, 기독교학과를 막 개설한 숭실대에서도 출강을 요청했다. 행정업무에 한계를 느낀 난 곧 숭실대 기독교학과로 완전히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교직에 들어섰다.
 
기독교교육 학자로서의 중흥기는 장로회신학대에서 맞이한다. 숭실대를 떠나 장신대에 와보니 기독교교육과 교수라곤 나 밖에 없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만 했던 그 시절이 당시엔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장신대는 기독교교육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 필요성을 절감했고 미래를 내다본 것이었다.
 
무엇보다 부족했던 건 좋은 교수요원들이었다. 우선 대구 계명대에서 강의하시던 왕마려교수님을 모셔와 기독교교육연구원을 개소했다. 뒤이어 신학교 때부터 눈여겨 보던 고용수교수를 한일신학교에서 모셔왔다. 독일 튀빙겐에서 교육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오인탁교수도 장신대 기독교교육과의 초창기 멤버로 초대됐다. 뒤이어 피츠버그대학교와 드류대학교에서 각각 학위를 마친 임창복, 사미자교수가 속속 기독교교육과의 가족이 되면서 기독교교육과는 점차 위상이 높아져 갔다.
 
교수로서 가장 행복한 때는 귀한 학생들을 만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수 많은 제자들을 만났고 그들이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 속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사실이 늘 자랑스럽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깊이 남아있는 제자를 말하라면 난 자신있게 고 이상양전도사를 꼽는다. '망원동의 성자'로 불렸던 그는 너무도 비참한 삶을 살던 망원동 주민들을 돕자는 나의 제안에 순종해 한걸음에 망원동으로 달려왔던 제자였다.
 
그때 함께 망원동으로 온 3~4명의 학부학생들은 망원동에서 침식을 같이 하고 그들과 사귀며 대화를 나눴으며, 환자가 생기면 들쳐업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내달렸다. 구청의 단속을 피하느라 한밤중에 공사를 해서 화장실을 선물했고, 다리도 놓아줬다. 당시 그 일을 이끈 사람이 바로 이상양전도사였다. 망원동에 그가 뿌린 사랑의 씨앗을 어찌 이 지면에 다 소개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천사같던 제자가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는 바로 지병인 폐결핵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가고 말았다. 사랑하는 제자를 잃은 그 아픔, 난 나의 제자 이상양을 마음에 묻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주선애

정리:장창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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