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제발 자손에게 대물림되지 않기를…

[ 연재 ] <나눔과 섬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중계동 백사마을을 가다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1년 06월 15일(수) 09:59
   
▲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중계동 백사마을의 전경.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30-3번지 일대. 일명 '백사마을'로 불리는 이 마을은 흔히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라고 불린다.
 
백사마을은 용산, 청계천 일대 등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이 이주해오면서 생긴 정착촌으로, 이 마을 산기슭의 주소가 '중계본동 산104번지'였다고 해서 '백사마을'로 이름 붙여졌다.
 
지난 9일 찾은 이곳은 슬레이트 지붕에 비닐로 집 주위를 두른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마을 골목에는 노인 몇 명이 나와 지루한 하루를 수다로 달래고 있었다.

#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중계동 '백사마을'

먼저 서울연탄은행(대표:허기복)에서 근무하는 문태희 사회복지사의 안내로 김금자 할머니(75세ㆍ가명) 집을 방문했다. 김 할머니는 30㎡ 남짓되는 집에 전세 1천3백만원짜리 집에서 살고 있었다. 가족은 85세의 남편과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3학년에 다니는 손자 2명. 전형적인 조손가정이다.
 
김 할머니네 가정의 수입은 정부가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주는 74만7천원이 전부다. 특히 요즘은 물가가 올라 식탁에 반찬 하나를 못 올릴 정도로 아껴쓰는데도 적자 나기가 일쑤라고 하소연한다.
 
김 할머니의 고민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번째는 손자들의 장래, 둘째는 부부의 건강, 셋째는 지역 재개발이다. 김 할머니의 이러한 고민은 사실 이곳에 살고 있는 2천7백세대(사실상 3천2백세대 가량 거주)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가난이 절망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물림된다는 것이 아닐까? 김 할머니의 집에 찾아간 시각은 오전 10시 정도였는데 18세의 큰 손자는 집에서 자고 있었다.
 
"막내아들 자식인데 큰 손자 5살때 여기로 이사와서 여태까정 키우는거야. 지금 고2인데 학교 성적이 안좋아서 관뒀어. 우리가 잘 가르칠 수가 없잖아."
 
김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바람이 나서 부인을 버리고, 집을 나간 후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10여 년이 넘도록 연락이 없다. 손자들 엄마는 지난 10년 동안 가끔씩 찾아와 얼굴을 비쳤지만 최근 4년동안 연락이 끊겼단다. 얼마 전 꿈에 위 아래 까만 옷을 입고 머리가 산발된 채로 나와 안부가 걱정된단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손자들은 공부에 영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들의 학업을 위해 어떻게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애들이 걱정이야. 우리 늙은이들은 이제 곧 저세상 갈거잖아. 지 고모들도 어려워서 얘네들을 못 거둘텐데…. 이 녀석들 생각하면 죽어도 눈을 못 감을 것 같아."

# 세가지 고민, '자손의 장래', '건강', '안정적인 주거'
   
▲ 백사마을에서 만난 할머니가 웃으며 배웅하고 있다.

 
손자 걱정에 표정이 어두워진 김 할머니는 대여섯가지 질병을 앓고 있어 약 봉지만 해도 한 손에 못 들 정도다. 관절염, 골다공증, 지방간, 심장질환, 고혈압 등 김 할머니는 안 아픈데가 없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다.
 
"젊어서 애들 뒷바라지 한다고 똥지게만 안졌지 안한 일 없이 다해봤어. 그래서 골병이 든거지. 막내아들 집나가고 손자들 보면 속이 쓰려. 그래서 병이 더 나나봐."
 
김 할머니는 보증금 1천3백만 원의 전세를 산다. 옆집은 보증금 3백만원에 월세 20만원이라고 귀띰한다. 비록 여름이면 덥고 여러 군데 비가 세고, 겨울이면 외투입고 담요를 둘러야 할 정도로 추운 집이지만 이렇게 네 가족이 발을 뻗을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김 할머니의 사정이 얼마 있지 않으면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최근 이곳 백사마을의 재개발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 인근의 중계본동주택재개발사업 주민대표회의 사무실에 들르자 이 소문은 사실로 확인됐다. 노원구는 최근 '중계본동 1종 지구단위계획 결정 변경 및 주택재개발 정비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이 마련되어 최근 공람절차에 들어갔다. 주민대표회의 관계자는 최고 20층 2천8백91가구로 재개발되는 안이 얼마전 확정됐다고 말했다. 전체 가구 중 1천5백31가구는 분양되고 1천3백60가구는 임대로 공급된다.
 
다시 인근 부동산을 찾아 재개발이 될 경우 백사마을에 사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을까 물었다. 부동산 관계자는 "임대아파트는 일반 분양 가격의 60~70% 수준인데 이 동네에서 이 금액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라고 반문한 후 한참을 생각에 잠기더니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 가난으로 절망과 수치스러움 느껴

 
거주지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이 동네의 다른 주민들과의 만남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취재 중 우연히 만난 반찬배달 봉사자들을 따라 지영훈 씨(67세ㆍ가명)의 집을 찾자 이웃집에 사는 김순자 할머니(73세ㆍ가명)가 놀러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신질환자인 동생의 폭력을 더 이상 못견뎌 강서구 가양동에서 지난해 3월 89세의 노모를 모시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지 씨는 젊은 시절 군대에서의 폭력사건으로 심한 간질을 앓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1천5백만 원 갖고 살 수 있는 집이 없는데 재개발이 되면 어디로 가야할 지 걱정"이라며 "재개발이 된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오히려 기자에게 되물었다.
 
함께 있던 김순자 할머니는 "오갈 데가 없어 몇 년 전부터 이곳에 사는 딸 집에 얹혀 살게 됐다"며 "사위 눈치가 보여 이 늙은 몸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는데 이것도 되지 않는 마당에 재개발이 되어 이곳을 떠나야 되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김 할머니는 "국가의 지원이라도 받아볼 요량으로 얼마전 구청을 찾아갔지만 구청직원으로부터 자식들이 이렇게 많은데 도움 안 받고 뭐하냐며 지원대상이 아니라는 말만 듣고 왔다"며 "사실 자식들도 모두 가난해서 자기 부모라고 해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것이 모든 가난한 이들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구청에서 거절당한 후 기분이 어땠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수치스러웠다"고 잘라 말했다.
 
백사마을에서 가난은 자손들에게 대물림되는 동시에 그 가난을 겪는 이들에게 절망과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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