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노이아 (μετανοια)일곱 번째 이야기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6월 08일(수) 11:3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필자가 개인적으로 자주 묵상하는 성경말씀이다. 그런데 통상 신약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은 선하고 관대하며, 사랑과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인 반면에 구약의 하나님은 엄격한 군주와 가부장적인 아버지, 즉 공의의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학자들은 종종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고대 유대사회에서는 7월 10일에 시행하는 '대속제일'에만 대제사장이 홀로 지성소에 들어가 야훼를 부를 수 있었던 만큼,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이렇게 절대자를 이름 지을 때 언어나 문자의 불완전성과 그 한계성을 지적한 사유체계는 세계 여러 종교나 철학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다.

예컨대, 노자는 도덕경 1장에서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다"하였고, 힌두교의 우파니샤드에서도 궁극 실재를 "이것이라 할 수도 없고 저것이라 할 수도 없다"라는 뜻의 네티 네티(neti-neti)라 하였으며, 선종의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공(空)사상이라든가, 주역에 언급된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며, 말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뜻의 의미를 다 전달해주지 못한다"는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구약성경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라는 단어를 야훼라는 이름 대신에 사용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야훼는 초월적인 절대 주권을 지닌 존재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한한 사랑의 이미지로 하나님을 묘사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한 '아바(Abba)'는 아버지를 뜻하는 예수님에게서만 확인되는 고유한 어휘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런 단순한 방식으로 부르지 않았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는 아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하나님에 비유하고 있다. 실제로 성경 곳곳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바'로 부를 것을 가르치고 있다.(막14:36, 롬8:15: 갈4:6) 이렇게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것은 당시 유대교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파격적인 태도이며, 천상의 지고지선(至高至善)한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사소한 일상에서 느끼고 가까이할 수 있는 친근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았던 셈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사랑과 하나님은 동격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우리가 지식적인 차원으로 인식할 수 없듯이 사랑 또한 학문적ㆍ지식적ㆍ과학적ㆍ객관적인 태도로는 결코 알 수 없는 대상이다. 즉 우리는 결단코 이 마음의 주체를 대상으로 삼아서 객관적인 연구를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랑이나, 신, 도덕, 종교는 반드시 우리 마음의 주체에 들어와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러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에 열거한 것들은 내재적 진리(intensional truth)에 속하는 주관적 태도의 명제인 셈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하였고,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것이라'하였다.

이렇듯 사랑 또한 우리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첨언하자면 직접 몸으로 느끼며, 실행으로 옮겨 몸소 체인(體認)해야 할 덕목인 것이다. 따라서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지식의 태도를 뛰어넘는, 한 차원 더 높은 태도이다. 이것은 그간 지면을 통해 필자가 누누이 강조했던 생명을 중시하는 실천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아울러 성경에 드러난 '사랑'이란 개념 역시 보편적인 원칙이지만 추상적 개념이라 말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사랑은 과학, 수학, 논리 등의 개념과 서로 같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도 '사랑'을 개념으로 정의를 내린 적이 없으며, 또한 문자를 가지고 풀어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렇듯 성경 곳곳의 사랑에 대한 언급은 우리 모두가 이해하기가 쉽고, 구체적이고, 친절하며, 진실하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하나님ㆍ사랑)는 체험의 영역인 것이지, 사변적으로 따지거나 논리적으로 캐내려는 지적 노력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진정 바라건대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가슴으로 깨닫고, 체득하여 이 땅에 사랑의 복음이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