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지나간 삶, 탈북자 위한 여생 살고파"

[ 나의삶나의신앙 ] 꿈꾸는 노인인 것이 행복하다는 주선에 교수의 이야기<1>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1년 05월 31일(화) 16:56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다. 하지만 두고 온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곳에 김일성의 초상화 대신 교회들을 세우고 평화의 도시를 만들고 우렁찬 찬송을 부르며 분단으로 인한 상처를 싸매주는 날을 나는 꿈꾸고 있다. 성령께서는 젊은이들에게 환상을 주고 늙은이들에게는 꿈을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꿈꾸는 노인이 된 것을 늘 감사한다.
 
분단 후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건만 여전히 이산가족들은 가슴 아파 울고 있고, 북한에 있는 우리 아이들, 손자와 손녀들이 굶주림으로 울부짖고 있다. 아니 이천만의 영혼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 꼭 통일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의 목메어 우는 소리를 우리 남한 백성들이 들어야 하고 사헝장으로 끌려나온 순교자들의 피를 남한 교인들이 봐야만 한다. 나는 순교가 무서워 도망친 죄인이다. 그래서 더욱 북한동포들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 통일을 꿈꾸며 드리는 기도. 이 기도가 한국교회 전체에 확산되는 그날을 고대한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책임이며 과제다.
 
주변에선 '이제 무슨 일을 하느냐.', '편히 쉬셔도 될만큼 큰 일을 많이 하셨다'며, 나의 건강을 걱정해 주는 목소리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대로, 몸만 편히 있다가 주님을 만나러 갈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 날까지 내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다 떠나기로 이미 다짐했고 기도했다. 그런 면에서 북한을 사랑하고 탈북한 우리의 동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내게 된 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다.
 
지금 돌아보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인생이었다. 1960년대 초, 우리 총회 교육부가 내게 교회학교 교재와 교육과정 수립에 참여하도록 기회를 준 것을 시작으로 기독교교육의 모종을 심던 초창기에 당장 필요했던 교재까지 직접 집필하며 동분서주했던 일이나 이 과목 저 과목을 강의하면서 기독교교육의 토태를 다졌던 일들이 먼저 생각난다. 1978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50주년을 앞두고 고작 1년의 기간만에 '장로교 여성사' 집필해 전국연합회의 희년 총회에 내 놓았던 일을 통해서는 순종의 의미를 배울수 있었다. 특히 3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했던 경험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내 나이 40세, 어느 날 기차여행 중 차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교회를 보며 이런 기도를 했다. "은퇴하면 차에 내가 먹을 것을 싣고 잠자리도 마련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전국을 다니며 시골교회들을 돕겠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운전면허증이었다. 세월이 흘러 60세가 되던 해에 운전면허시험장에 등록했다. 이때도 모두가 말렸지만 난 보란듯이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중고차를 사서 드디어 운전을 하게됐다. 이 일로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용기를 얻으셨고 나 또한 "나이가 들었다고 못할 일은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이후 83살이 될때까지 23년 동안 어머니와 남편의 기사 역할 뿐 아니라 그 많은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고, 운전을 하면서 더 많은 기도와 찬송을 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때 얻었던 자신감이 결국 여든이 넘은 나이에 탈북자를 섬기는 사역을 시작하는데도 용기를 주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삶, 부족한 나의 인생의 조각조각들을 모두 4회에 걸쳐 지면을 통해 소개할 수 있게된 것이 무척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린다.

주선애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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