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7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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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4월 28일(목) 10:32

월-영적인 오염을 제거하자
본문: 신 13:1-18
찬송가: 322장(구 357장)

지난 날 우리는 구제역으로 가축을 살처분하며 함께 울었다. 불쌍해서, 아까워서, 안타까워서 울었다. 이러한 조치는 더 이상의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모세는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세가지 경우의 유혹을 예고한다. 첫째는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이적과 기사를 통한 유혹이다. 즉 가시적인 충족을 통해 찾아오는 유혹이다. 둘째는 형제, 자녀 등과 같은 소중한 이들을 통한 유혹이다. 셋째는 불량배를 통한 강압적인 유혹이다. 이러한 유혹으로 참된 신앙이 아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신들을 섬기자"라며 우상숭배를 유도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명령한다. 이러한 유혹에 대한 경계령은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사도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하셨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을지라도 두려워말며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따라서 영적인 오염을 일으키는 것으로 인하여 신앙을,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 있다면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
 
비록 뼈를 깎는 아픔이 따른다 해도우리의 신앙과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에 대해선 불가피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해 너무도 실감나게 말씀하신 바 있다(마5:29-30). 하나님은 우상숭배가 우리인생에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을 경고하고, 그 유혹에 어떻게 대처할지 생생한 묘사를 통해 마음을 무장시키고 있다. 우리 모두는 유혹에 약하다. 그러니 영적인 오염을 제거함이 마땅하지 아니하겠는가!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를 더럽히고 어두운 데로 이끄는 유혹으로부터 안전히 거하게 하옵소서. 영적인 오염으로부터 멀리할 결단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영권 목사
영도교회 시무


화-그리스도의 영으로 하나가 되라
본문: 롬 8:1-17
찬송가: 260장(구 194장)

하나님의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그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성도가 구원의 한 생명체인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성도는 결코 정죄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 그 육신에 죄를 정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행하는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영생과 평안을 누린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삶은 육신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장사한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과 원수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영생한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자들은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영생과 평안을 얻은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는 우리의 몸도 부활시키신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보화가 가득하다. 만물의 충만함과 신성한 충만한 것이 다 그의 육체에 거한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이요, 우리 영광의 소망이시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삶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된 자들은 그의 의를 입어 거룩한 자들로 하나님과 화목된 성도들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그리스도의 영을 모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임연섭 목사
한사랑교회 시무


수-하나됨을 위하여
본문: 엡 4:1-6
찬송가: 220장(구 278장)

어느 무더운 여름날 무료함을 달래고자 서울과 경상도 할머니가 끝말이어가기 게임을 했다. 서울 할머니가 먼저 문제를 냈다. "계란." 경상도 할머니가 대답했다. "란닝구." 서울 할머니는 "외국어는 안 돼요"라고 주의를 줬다. 그리고 다시 문제를 냈다. "타조." "조오~쪼가리." 서울 할머니는 처음 듣는 말에 눈을 흘겼다. "사투리도 안 돼요"라고 말하고는 세 번째 문제를 냈다. "장롱." 경상도 할머니는 생각에 잠기더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농~갈라~묵기." 서울 할머니는 알아듣지 못했다. 너무나 다른 생각과 말에 화가 많이 났다.
 
이 두 할머니는 너무나 다른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서로 다른 재질, 모양 또는 다른 성품이나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이혼율 세계 3위, 수많은 노사간의 분쟁과 교회 안에 갈등을 안고 있다. 실은 이 모든 문제가 서로 다르고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정말 그런가? 다르기에 하나 될 수 없는가?
 
그럼 우리 몸에 달려 있는 손을 보라. 서로 다른 다섯 개의 손가락이 제 각기 다른 모양과 굵기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먹을 쥐면 하나가 된다. 시계는 다양한 크기의 수많은 톱니바퀴들과 나사들이 맞물려 있다. 다르기에 온전히 하나를 이룬다. 하나님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바울은 말한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오늘의 기도

서로 다르다고 미워했고, 외면했습니다. 이제는 서로 다르기에 사랑하며, 함께 할 수 있음을 알게 하소서. 우리와 다른 이웃을 주님과 같이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남종범 목사
안강제일교회 시무


목-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회
본문: 마 19:13-15
찬송가: 565장(구 300장)

전도자 무디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할 때의 일이다. 노방전도를 하고 돌아와서 그는 다음과 같은 전도 보고를 했다. "저는 오늘 두 사람 반을 전도했습니다." 리더가 무디에게 물었다. "두 사람 반이라고요? 아! 알겠습니다. 어른 두 명에, 어린이 한명을 전도하셨군요. 기차표도 반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디는 "아닙니다. 어린이 두명에, 어른 한명 전도했습니다. 어른들은 인생을 벌써 절반 이상 살았기 때문에  반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아직 인생을 다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한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린이, 청소년 전도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예화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거의 다 어린 시절에 주님을 영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폴리캅은 9살 때 예수님을 만났고, 조나단 에드워드는 7살 때, 매튜 헨리는 11살 때, 스펄존은 12살 때 만났다.
 
어린 시절에 주님을 만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어린 시절에 만난 사람은 일생을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영혼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구하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일생의 헌신자로 잘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로 데리고 나와야 한다. 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들로 가득차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미래가 있다. 예수님이 아이들을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도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잘 키워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교회의 희망은 다음세대에 있음을 깨닫고, 어린이 청소년들을 축복하고 격려하여 잘 키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철훈 목사
흰돌교회 시무


금-행복의 비결
본문: 창 12:1-9
찬송가: 249장(구 249장)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복이 되는 복이다. 본문 2절 말씀 "너는 복이 될지라"는 말씀처럼 복 자체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인 복이 되어 세상을 복되게 하고 있다. 인류의 유일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으로 오신 것이 그 증거이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이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가장 존귀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받고 새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장 큰 복이 된 사람답게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복으로 살아가므로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 부모님에게는 복된 자녀가 되고 자녀들에게는 복된 부모가 되며 형제자매에게는 복된 형제자매가 되어 주고 친척 친구 이웃과 교우들에게 복이 되어 주어야 한다.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만나게 해 준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겠는가?
 
행복의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복이 되어 주는 것이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어 줄 때 그 사람들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더욱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해진 사람이 많아질 때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복으로 부름 받은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저희를 세상의 복이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감격하면서 어디서나 복으로 살아가므로 삶의 자리를 아름다운 곳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국현 목사
한일교회 시무


토-나눔의 은혜
본문: 레 19:9-10
찬송가: 455장(구 507장)

사람들 중에는 저수지 같은 사람이 있고 파이프 같은 사람이 있다. 저수지 같은 사람은 늘 어떻게 하면 많이 모을까 고민하는 사람이다. 반면 파이프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흘려보내 나눌까 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나눔의 목적이 구제 자체가 아니라 탐심을 없애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탐심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몫구분을 해야 한다. 내 소유일지라도 하나님의 몫, 이웃의 몫, 나의 몫이 있다. 이웃의 몫은 얼만큼인가? 오늘 성경은 밭의 네 모퉁이를 베지 말라 한다. 사각형의 밭에 내접원을 그리고 그 공유된 빗금친 부분을 계산하면 약 21.4퍼센트이다. 이것이 이웃의 몫이다. 하나님의 몫(십일조)과 이웃의 몫을 떼어야 탐심을 이기며 살 수 있다. 그런데 이웃의 몫을 떼는 방법이 있다. 내가 복을 줄터이니 억지로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힘으로 부를 나누게 하는 것은 공산주의며 세금으로 나누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반면 은혜와 사랑으로 나누게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또한 인격적인 나눔이어야 한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배려해 나누는 것이 신앙적인 나눔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밭 네모퉁이를 베지 말고 놔두면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최소한의 수고로 곡식을 가져가게 하라 하신다. 가난한 사람도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존심이다. 받는 사람의 자존심과 인격을 배려할 때 성경적인 나눔의 정신이 완성된다.
 
우리가 연약한 자의 약함을 담당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 "하나님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기도할 것이다. 이럴 때 진정 하나님의 복이 임할 줄로 믿는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탐심을 버리고 나의 소유 안에서도 하나님과 이웃과 나의 몫을 나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의 도움을 통해 세상이 더 살만하고 밝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동일 목사
안락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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