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노이아 (μετανοια) 두번째 이야기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4월 27일(수) 13:51

요즘은 기독교의 본질이 일부 가벼운 성도들로 인해 변질되고 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말만 앞세우는 기독교인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이나 종교에서도 행동과 실천이 일치되어야 함을 누누이 강조한다. 예컨대 지행합일(知行合一), 실천궁행(實踐躬行), 체인(體認),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란 명제가 이를 대변한다.

공자 역시 '위정편'에서 "머리로만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실행으로 옮겨 말과 행동이 합치되는 경지가 참된 지식"이며, '이인편'에서는 "말보다 행동이 더 앞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어떤가? 입과 혀로는 침이 마르도록 예수님을 찬양하면서도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약4:17)하셨고, "입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요일 3:18)하셨으며,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마7:21)하셨다.

또한 "율법을 듣는 자가 되기보단 율법을 행하는 자가 더 의롭다"(롬 2:13)하셨다. 이러한 실천궁행(實踐躬行)의 삶을 외면하고, 등한시한 채, 단지 우리의 신앙생활이 개인의 욕망 성취나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기대 속에 숨겨놓아서도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물론 동양의 전통에는 다섯 가지 복을 으뜸으로 삼는다. 첫째는 오래 살고(壽), 부자가 되고(富), 건강과 안녕을 누리고(康寧), 즐거움으로 도덕을 따르고(攸好德), 마지막에는 제 명대로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 것(考終命)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이 복을 모두 누리려면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한다는 것만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강조하는 듯하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자체가 복이라면 복일 텐데 위에 열거한 오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부각시키는 것은 참된 신앙인의 자세라 말하기 어렵다.

물론 축복을 바라는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며, 언제나 행복하고 심지어 예수님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실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은 주위에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들을 셀 수도 없이 열거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더 확신 있게 전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목도할 때면 씁쓸한 맘이 앞선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나의 뜻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가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기복(祈福)과 기복주의(祈福主義) 신앙을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복이 꼭 물질적인 축복만은 아니다. 마음의 행복, 건강, 영혼의 기쁨 등 보이지 않는 복도 많다. 사도 요한도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하였다.

우리는 그런 복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있도록 계속 기도를 해야 하고,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 끝으로 요즘 사회학에서는 교인(Christians)과 교회 가는 사람(Church-goers)을 구별하기도 한다.

교회 가는 사람이란 신앙 때문만이 아니라 기타 다양한 이유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린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 바라건대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실천을 통하여 영혼이 미소 짓는 행복한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황순환목사/대전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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