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보다는 삶을…

[ 목양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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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3월 22일(화) 18:51

목회를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공부도 많이 했고, 많은 신앙적 서적도 읽었다고 한다. 얘기를 하다보면 기독교나 기독교 단체 혹은 이단들에 대해 목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럴 때는 얘기를 하면서 묘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모습은 과거 우리의 지식적 관심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한동안 IQ(지능지수)가 높아야 성공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지능지수가 높으면 많은 것을 기억하기도 하고, 결국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의 심리학자 다니엘 골만의 저서 '감성지수'(emotional intelligence)를 통해 지능지수보다는 인간의 인격이나 관계성이 성공적인 삶에 더 가깝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감성지수를 높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과거 교회에서도 성경공부를 할 때는 지적인 것을 채워주려는 공부를 많이 했다. 결국 성도들은 머리로는 많이 아는데 실제적인 삶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의 현주소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런 방법은 계속되고 있다. 성경공부하면서, 혹은 성지순례를 하면서 지명을 외우도록 시킨다. 그리고 많이 암기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칭찬을 하기도 한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신앙적 인격과 삶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머리로 많은 것을 아는 지식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을 주고, 본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성경 지명 하나 외우게 하는 것보다 한 구절이라도 성경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한 때가 되었다고 본다. 수많은 성경공부를 했던 사람에게서 신앙적 인격을 볼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지식의 주입을 통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방법은 성경적 방법이 아니다. 이는 헬라식 사고구조라고 할 수 있다. 헬라에서는 지정의를 구별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지식은 아는 것이 곧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안다'는 단어는 체험적으로 알아야 '안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벽 앞에서 성경을 계속 읽어대는 유대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이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과 함께 살려는 모습이요, 헤브라이즘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은 헬라적인 사고로 가득차 있음을 볼 때가 많다. 마치 예수님을 믿으면서 불교나 유교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식적인 성경공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즘은 우리가 알고 싶은 지식은 컴퓨터만 열면 다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미 사회는 'know how'나 'know what' 보다는 'know where'로 옮겨 간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아직도 성경을 읽고 삶을 사는 원래적인 모습보다는 지식적인 것을 채우려는 시도가 많아 보인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추상적, 관념론적, 헬라적인 하나님보다는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는 구체적인 고백이 성경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방법의 전환을 통하여 본질에 다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면 과감하게 틀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장경덕 / 목사 ㆍ 가나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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