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 나의신앙- 홍희천장로 <1>

[ 나의삶나의신앙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1년 02월 28일(월) 11:39
   
▲ 창동염광교회 초창기 당회원 사진. 1984년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본인.
오늘도 성경을 편다. 지금 나는 성경 1독을 진행 중이다. 성경 1독을 위해 스스로에게 1백일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기간은 짧지만 집중하며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있다.
 
칠순을 넘었다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종심(從心)의 신앙'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세월, 어찌 하나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온전히 주님을 만났던 어린 시절 순백의 신앙을 다시 곱씹어 보고자 특별한 성경 1독을 진행하고 있다. 어릴적에 깨달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견고한 신앙의 힘으로 모든 풍파 속에서 여지껏 버텨왔다고 감히 고백한다.
 
나는 1939년 2월 14일 경기도 양평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신 아버지 홍준식권사와 어머니 강용숙권사 슬하 5남 1녀 중 셋째였다.
 
가정 형편은 끼니만 해결할 정도였다. 감사한 일은 당시 흔치 않게 모태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어릴 적부터 원인모를 속병을 앓아 병약했던 아버지는 결혼 후 증조부 사촌제수의 인도로 고읍교회 사경회에 참석해 복음을 접하고 그 자리에서 결신했다. 아버지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았는데,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하고 병이 고쳐졌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집안의 모든 제사에 참석을 안하셨다. 더욱이 장손이라 집안 어른들의 핍박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체험적 신앙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버지는 복음을 접하게 해준 증조부 사촌제수와 훗날 병산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권유로 믿음생활을 시작하셨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처럼 부모님의 신앙은 누구보다 뜨겁고 열심이었으며 간절했다.
 
우리 집은 매일 예배를 드렸다. 부모님께서 하루 농사를 마치고 정리한 후 예배를 시작한 시간이 밤 9시 정도였으니, 우리 형제들은 졸립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은 농사 일에 아무리 지쳐도 예배를 거른 적이 한 번도 없다.
 
새벽기도 또한 하루도 빠지지 않으셨다. 교회에서 '부지런쟁이'로 불렸던 아버지는 새벽종을 울리는 담당이셨다. 우리 형제는 부모님의 기도를 먹고 자랐다고 볼 수 있다.
 
나 또한 부모님을 따라 새벽기도회에 자주 참석했다. 초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그저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계속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에는 몰랐지만 부모님의 기도가 나도 모르는 사이 몸도, 정신도 여물어가게 한 것 같다. 가난 속에서도 신앙은 불평을 줄이고, 희망과 꿈을 잃지 않게 해주었다.
 
부모님의 신앙 교육은 엄격했다. 특히 기도의 생활화를 강조하셨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마무리할 것을 늘 권면하셨다. 범사에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교육시켜 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누군가 나에게 '지난 72년간 어떤 삶을 사셨오?'라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행복했지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꿀같이 달고 마음에 와 닿지만, 신명기 33장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를 묵상할 때면 마음이 더욱 뜨거워짐을 느낀다.
 
홍희천
창동염광교회 원로장로 / (주)동원 대표이사
<정리=신동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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