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

[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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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2월 22일(화) 17:35
3ㆍ1운동 92주년을 맞는다. 오늘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희생하신 조국 선열들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당시 3ㆍ1운동은 기독교가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3ㆍ1운동의 실제적인 시작도 파고다공원에서 전도사였던 정재룡의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출발되었다.

한국기독교가 3ㆍ1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3ㆍ1운동이 발발하던 1919년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는 1천7백만명 정도였다. 그 중 기독교인은 30만 명을 채 넘지 못했다. 말하자면 기독교 교인은 전 인구의 2%에도 이르지 못한 약한 교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 인사들이었고 3ㆍ1운동 준비과정의 중심인물 48명 중 24명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던 만세운동 기간에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곳도 한국교회였다. 3ㆍ1운동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터졌던 민족운동의 거대한 흐름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3ㆍ1운동이 주는 의미는 크다. 첫째, 기독교는 오늘 우리의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오늘의 어둔 세상에 빛이 되고 부패한 세상에 소금이 되어야 한다. 둘째, 민족의 아픔을 교회의 아픔,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구제역과 조류독감을 통해 고통 받고 있는 농민들, 경제적 불황 속에서 실의에 빠진 이들,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위해, 어려움을 당하는 농민들과 국민들의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민족의 고난 앞에 모든 기독교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3ㆍ1운동은 교단을 초월하여 전 국민적 운동으로 승화시킨 기독교의 쾌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신사참배 결정과 교리적 싸움으로 교단이 분열되었지만 오늘 우리는 3ㆍ1운동을 회고하며 민족적 과제 앞에 모두가 연합하며 화합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제95회 총회에서는 '위안부' 관련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기금 모금을 총회적 차원에서 진행할 수 있도록 결의한 바 있다. 이 기금모금의 마감이 2월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3ㆍ1운동의 중심에 섰던 당시의 기독교를 생각하며 오늘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고통을 당한 분들을 위해, 그리고 당시 기독교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박물관 설립에 참여하기를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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