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 톤즈'가 주는 교훈

[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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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2월 10일(목) 15:08
 
요즘 '울지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전 국민을 감동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해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예수'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우리 교단의 목사나 장로가 아니고 특별하게 헌신한 권사도 성도도 아니다. 가톨릭 사제인 이태석 신부였다. 비극의 땅인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라고 하는 곳에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 소외된 자들을 위해 몸소 실천한 그의 헌신과 그리고 그의 죽음은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무신론자이든 불교신자든 누구나 할 것없이 눈시울을 적실 뿐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삶에 감사해 하고 있다.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그가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태석 신부의 삶을 바라보며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질문은 나에게 왜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이 없는지, 그리고 우리 교단에는 어떻게 그런 삶을 사는 예수의 제자가 없는지를 묻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도 소외되고 낮은 곳에서 헌신하고 있는 예수의 제자와 예수의 종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그 이름만 들어도 감격하는 이들을 하나둘씩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이태석 신부와 다미안 보다도 더 훌륭하게 예수의 뒤를 따라간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분들로 인해 위로받고 용기도 얻으며 그 분들로 인해 예수가 자랑스러워 예수의 이름을 전하게 된다.
 
주된 요지는 이태석 신부가 속한 로마 가톨릭과 경쟁하자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세상에 홍보하자는 것도 아니다.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서 언론 플레이를 잘 하자는 주장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만을 사랑했던 신앙인들과 주의 종들, 그리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어간 분들이 있다. 그들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은 골고다에 뿌린 예수의 거룩한 피처럼 오늘의 한국 기독교의 토양을 만든 분들이었기에 비록 우리 자신들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들로 인해 위로받고 희망을 갖게 된다. 십자가의 길을 걷고 순교자의 길을 걷는 것은 그 분들의 몫이었고 그들은 그 몫을 다했다.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할 몫은 예수를 따르던 그들의 아름다운 십자가의 길을 말하고 골고다 길을 이야기하며 빛이 되게 하는 일이다. 언론을 통하든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 그 일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 있고 우리 교단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몫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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