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가지고 작은 자들과 함께 힌 복지의 길

[ 교계 ] 시대별 요청에 따른 기독교 사회복지의 변화<1>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1년 02월 09일(수) 09:50

시대에 따라 그 시대만의 이슈와 과제가 있듯이 사회복지 사역에 있어서도 시대적 요청에 따라 특정한 사역이 시작되거나 그러한 사역을 하는 단체나 기관이 설립되어 왔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와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한국의 사회복지를 위한 사명을 감당하는데 그 누구보다 앞장서왔다. 본보는 '나눔과 섬김' 지면을 통해 '시대별 요청에 따른 사회복지의 변화'를 주제로 두 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한국 선교의 역사는 한국 사회복지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9~20세기 우리나라에 들어 온 선교사들은 복음과 함께 사회복지 사역을 동시에 추진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목숨을 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사회복지 사역의 경우, 대상자들에게 복지 혜택을 수혜한다는 측면에서 복음전파의 영역보다는 쉽고 빠르게 성장했으리라는 통념과는 다르게 초기에는 우리 국민들(당시 조선백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그 사역을 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단적인 예가 1888년 조선 전역에 퍼진 외국인들의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터무니 없는 유언비어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터무니 없는 소문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1888년 6월 18일 조선 주재 미국 공사 딘스모어(Hugh A Dinsmore)가 외아문 독판 조병식(趙秉式)에게 '외국인들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삶아 먹고 쪄 먹는다는 헛소문이 갑자기 생겼는데, 조선 정부에서 방(榜)을 만들어 한성 각처와 지방(城外)에 게시하면 소문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낼 정도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나라의 이익을 빼먹는 외국인들의 앞잡이로 인식되기도 해 조선인들의 폭행과 테러의 공포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사회복지 활동은 위축되지 않고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 선교와 사회복지의 동시 시작

우리나라의 많은 사학자들은 한국 기독교 사회복지의 효시를 1885년 최초의 근대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이 알렌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광혜원의 설립과 함께 우리나라 선교 초기 기독교 사회복지는 교육과 의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이 당시에는 광혜원 이외에도 여성 질병치료를 위한 보구여관을 비롯해 1910년경까지 30여 처에 세워진 병원을 통한 의료선교는 전근대적 미신을 없애고, 계층 간의 소외의식을 제거하며, 문명세계와의 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교육분야에 있어서는, 당시 기록을 보면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은 배재, 이화, 경신 등을 비롯해 1909년 현재 7백20여 개의 학교에 1만7천6백56명의 학생을 교육시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교육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일반 학교는 60개교 1만 9백14명에 불과)
 
이중 특히 경신학교는 1886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아들을 위해 세운 고아원으로 시작, 사회적 소외계층을 위한 사역으로 시작된 경우다. 이외에도 감리교 홀 선교사(R. S. Hall)는 1894년 최초의 맹인학교를 세웠으며, 1897년에는 불구 아동을 위한 집이 건립되기도 했다.
 
의료와 교육분야의 사회복지 이외에도 선교사들과 일부 조선인들은 백정 해방운동, 형무소 선교, 여성계몽을 위해 힘썼다.
 
사무엘 무어(S. F. Moore) 선교사는 고종 황제에게 백정 해방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렸고, 승동교회 교인 백정 박씨 등과 함께 백정 해방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무속신앙의 구습에 빠져 세계관의 수정이 시급했으며 이와 함께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많았다. 1898년 외국인들의 조사에 따르면 매년 무당에게 바치는 낭비가 조선 예산 전체(4백41만8천4백32달러)의 약 세 배인 12만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재래 무속 기도의 주요원인이 여성의 무식과 무지에 있다고 보고, 미신타파와 직결해 여성교육에 매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NGO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이 1903년 10월 28일 창립됐다. 1899년 개화청년 1백50명이 개화자강의 열정을 YMCA운동 속에서 실현하고자 세계 YMCA연맹에 한국 YMCA의 창립을 건의한 결과였다.
 
서울YMCA는 그 태동이 민족운동단체조직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초창기 을사조약 반대 고종양위 반대 등의 운동을 벌였고, 친일조직인 일진회와 대결해 가는 가운데 항일운동을 벌여 나갔다. 서울YMCA는 초기 상류층 지식인 자제들이 모여 결성했으나 이후 상민층이 가담하면서 더욱 역동적이 됐고, 특히 이상재 김정식 윤치호 김규식 등 민족지도자를 비롯한 기독교 지식인이 대거 가입하면서 민족운동체로서의 조직을 공고히 했다.

#1920~40년대 절제운동과 빈곤퇴치

1920년에 들어선 한국사회는 심각한 실제적 빈곤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농민의 빈궁은 극도에 달했고 총독부의 아편 전매와 공창의 보급은 도덕적 퇴폐를 부추겼다. 이에 기독교는 농촌계몽운동과 절제 및 폐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며 절대빈곤 퇴치와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농촌계몽운동은 YMCA가 1925년 농촌부를 신설한 것을 필두로 장로교, 감리교,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 조선 남녀 기독교청년회의 등이 연합으로 농촌사업협동위원회를 결성, 농사강습소를 전국적으로 시행하면서 본격화됐다. 이와 함께 김용기는 가나안 농촌 운동을, 유재기는 1교회 1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에는 결핵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아 선교사들은 결핵퇴치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핵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당시 기록에 따르면 2천5백만 명의 인구 중 50%가 결핵감염자이고, 약 1백60만 명 이상이 결핵을 앓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1920년 세브란스 병원 내 최초로 결핵병원이 세워졌으며, 뒤를 이어 평양 결핵진료소(1925), 해주의 감리교 구세 결핵요양원(1928) 등이 세워졌다. 특히 구세의원의 홀 부부는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해 우리나라 결핵퇴치운동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장로교계의 면려청년회(1921년)와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창설(1923)은 우리나라의 잘못된 관습과 당시의 사회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일으키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절제 운동을 펼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금주, 금연, 공창 폐지, 축첩 반대와 아편금지운동을 전개하며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청소년보호법 제정케 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외에도 당시 10세 미만의 사망율 45.5%에 달해 기독교계는 어린이의 질병에 대한 관심을 갖고, 1929년 유아복지센터를 세우고 2백24개 처의 진료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사회봉사운동의 종합적 형태가 등장한 것도 1920년대부터다. 서울의 내화여자관(1920), 송도의 고려여자관(1922), 평양의 애린원(1935) 등은 오늘날의 종합 사회봉사운동의 형태를 띤 최초의 기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 참조: 기독교사회복지엑스포2010 사료관, 서울 YMCA>

이 기사는 한국기독공보 홈페이지(http://www.pckworld.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