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동포, 강도만난 21세기 지구촌 이웃

[ 기고 ] 북한동포를 향한 한국교회의 자세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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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1월 26일(수) 11:59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김명혁)가 지난 14일 새문안교회(이수영목사 시무)에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를 주제로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다. 본보는 이날 발표회에서 '북한동포를 향한한국교회의 자세와 책임'을 주제로 발제한 림인식목사(노량진교회 원로, 증경총회장)의 글을 게재한다.다.  <편집자 주>


오늘 21세기 지구촌에서 큰 강도를 만나 귀중한 것을 모두 빼앗겼을 뿐 아니라 죽게 된 이웃은 바로 북한동포이다. 죽어가는 북한동포에게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사마리아인에 관한 말씀이 유일의 복음이다.(눅 10:30∼37)
 
본문에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세 사람을 그 길로 지나가게 하셨다. 이 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북한동포를 불쌍히 여기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강도 만나 죽게 된 북한동포의 이웃은 한국교회로 택하셨다.
 
그리고 이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한국교회에 신앙도 자유도 풍부도 번영도 기회도 사명도 다 주셨다. 오늘날 한국교회 입장에서 가장 눈앞에 닥친 불쌍히 여겨야할 이웃은 북한동포이다. 그런데 북한동포를 대하는 한국교회는 본문이 암시하는 3종 철학과 교회로 나눌 수 있다.
 
1. 강도 철학이다. "네 것은 모두 내 것이므로 빼앗는다"는 철학의 교회와 신자이다. 이런 철학을 가지면 '모두 다 빼앗아라'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만 강조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는 것은 생각지 않고 '나와 우리 교회만 잘되도록 쓴다'로만 살게 된다. 이런 교인들과 교회는 강도 피해를 받아 죽게 된 북한동포를 마치 강도와 같은 무리로 보고 대하여 적대시 한다. 죽어가는 북한동포에게는 도리어 절망만을 안겨준다. 오늘날 교회 중에는 없어져도 좋을 교회가 있다.
 
2. 제사장 레위인 철학이다. "내 것은 내 것이므로 잘 지킨다"는 철학이다. 이런 철학을 가지면, 이웃이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그냥 피하여 지나가자'로 살게 된다. 이런 신자들과 교회는 죽어가는 북한동포를 마치 타인(남)으로만 보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지나간다. 이 땅위에는 있으나 마나한 교회도 많다.
 
3. 선한 사마리아인 철학이다. "내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나누어 준다"는 철학이다. 이런 철학을 가지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붙들어 주자' '일으켜 주자' '구해 주자' '살려 주자' '도와주자'로 살게 된다.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신자와 교회이다. 이런 성도들과 교회는 북한동포의 상태를 마치 내가 당한 것으로 여기고, 혹은 내 가족(부모나 처 자녀 및 권속)으로 여겨, 구체적으로 돕는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철학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주신 것이다.
 
이 본문에서 눈여겨 봐야하는 면이 있다. 그것은 '강도가 누구냐?' '강도를 잡으라'는 말씀이 없다. 지나가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사마리아인도 강도를 찾거나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주님도 그 방면에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강도 만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시며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만약 사마리아인이 강도잡겠다고 시간을 보냈다면 강도 만난 사람은 죽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북한에 관심과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북한에 강도 만나 죽게 된 동포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강도에만 신경 쓰면서 강도 만나 죽게 된 동포는 계속 죽고 있는데 관심도 책임도 지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강도에 관하여 언급을 하지 않으셨을까? 강도는 주님이 책임을 지시고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미 독일의 나치당이나 일본 제국주의나 전세계 공산주의라는 강도는 심판하셨다. 한국교회는 강도를 잡아 없앨 만한 능력은 없다. 그런 책임을 주셔도 감당이 안 된다. 다만 한국교회는 강도를 심판하시는 주님께 속히 북한동포에게 신앙의 자유와 살길을 주십사고 기도와 간구를 드리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그 심판은 주님께 맡기고 오직 한국교회는 강도 만나 죽게 된 동포의 영육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급선무요 책임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제사장, 레위인처럼 피하여 지나가고 있다. 이제라도 온 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한다. 한국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면 죽어가는 북한동포의 영육구원이 이루어진다. 한국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구원하여 주면 강도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되어 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지 못했을 때는 강도 문제가 해결 되어도 죽어가는 동포의 영육구원은 영원히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북한동포가 강도 만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그 극도의 불행이 하나님을 찾는 기회가 된다면 천만다행한 일이 된다. 본문의 강도 만난 상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 살아났듯이 바로 한국교회가 북한동포를 돕는 것을 우선순위의 첫째로 하는 이웃이 된다면 북한동포는 구원을 받는다.
 
옛날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했던 것처럼 한국교회는 "우리에게 주신 온갖 은혜를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로 생각해야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를 포기한다면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는 말씀대로 강도 만난 북한동포는 다른 기독교인을 통하여 구원 얻게 하실 것이다.(근간 북한과 유럽교회와 교류설, 혹 미국 신자에 의해) 기회와 책임을 회피한 한국교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로 책망하시고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엄벌을 내리실 것이다. 만약 남북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일할 기회를 놓치면 적대시로 인해 피차의 앙화가 될 뿐만 아니라 자손만대 저주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한가지 명확해야 하는 것은 한국교회는 한국 정부나 북한 정부와 같은 입장에서 같이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문의 경우 가령 강도가 다시 나타나 강도 당한 사람을 인질로 하여 대치가 되었다고 가정을 하자. 그러면 많이 어려워진다. 방법은 첫째, 협상(지금까지의 방법) 둘째, 인질범만 돕는다.(최악행, 동범자) 셋째, 인질범은 무시하고 인질만 돕는다. 넷째, 장시간 대치로 지치게 한다.(무책임) 다섯째, 무력공격으로 인질범 생포나 사살(위험 많음) 여섯째, 인질이 인질범 제압(가장 바람직하나) 일곱째, 인질범의 이상변동(급병 사고 등) 이상의 방법은 어디까지나 정부나 군부의 몫이다.
 
남북한 정부나 군부 당국자는 정치적 군사적 책임을 다해야한다. 그것을 잘못하면 책임을 져야 하고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 정부가 하는 햇볕정책도, 북한 정부의 무력통일이 그 일환이다. 교회는 물론 양 정부의 협의나 협조는 필요하나 정부에 관여하거나 역행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하는 것은 '햇볕정책'도 '흡수통일'도 아니고, 북한 정부의 '무력통일'도 '심리교란작전'의 심부름도 아니다. 물론 반정부 운동도 아니다. 그렇다고 조국을 버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마틴 루터가 "그리스도에게는 국경이 없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하며 "죽기까지 복음주의, 죽기까지 독일주의"라고 하였다.

림인식
목사ㆍ증경총회장ㆍ
노량진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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