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리고 말씀

[ 논설위원 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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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1월 05일(수) 11:55

조선 숙종 때 허미수와 송시열은 정적으로서 허미수가 송시열에 의해 좌천되기도 하고, 후에 허미수는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로 원수 같은 사이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후에 송시열이 중병으로 고생할 때, 그는 아들을 허미수에게 보내 약 처방을 얻게 했는데, 처방전에는 극약인 비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족들은 허미수가 송시열을 죽이려는 줄 알고 반대했으나, 송시열은 기꺼이 처방전대로 약을 복용했고, 깨끗이 나았다. 허미수는 그 소식을 듣고 송시열이 강건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문안인사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정적끼리도 최소한의 예의와 존경심이 있었다.
요즘 그런 예절이 그립다.

요즘 우리 사회는 술 취한 사람들처럼, 막가파식 말과 행동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연말은 유달리 말 때문에 피곤했다.

여당의 대표가 연평도에서 했다는 '보온병' 발언이나 '자연산' 발언도 그렇고, 모 시장이 연평도에서 했다는 '폭탄주' 발언도 그렇고, 야당의 유력한 정치인이 가두연설을 하면서 했다는 '죽여야 한다'는 발언도 우리 마음을 편치 않게 했다.

물론 정치인은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안다. 듣기에는 전문가에게 연설 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고사성어를 외우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연설문을 작성해주는 보좌관을 따로 두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글로 표현된 연설문이나 입으로 뱉어진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말과 연설을 하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말의 출처는 사람의 내면이라고 하셨다.(마 12:33~34)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는 흔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말로 의롭다 함을 받기도 하고, 정죄를 받기도 한다고 하셨다.(마 12:36-37) 이렇게 볼 때 말은 절대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말 때문에 살기도 하고, 말 때문에 죽기도 한다. 멋진 말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감동을 준다. 말 몇 마디가 흩어졌던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말 몇 마디가 사람들을 갈라놓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인만 말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그 사역의 중심에 서 있는 목회자들의 사역의 90%는 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숙제는 우리의 말을 '말씀'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끌어내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특히 요즘 들어 강단 언어가 너무 비속어로 채워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표준말은 아니더라도, 문법상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품격 있는 언어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 일차적 책임은 설교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도 이 말씀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 속에 '말씀되게'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려면 우리 안에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거룩함에 근거한 아름다운 삶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말이 신뢰를 받을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무수한 천박한 말들의 홍수 속에 '말씀'의 생수를 공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겠다. 새해에는 아름답고 신선한 말씀들로 채워지길 소망한다.

김운성 / 목사ㆍ영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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