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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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01일(수) 09:31

방지일목사님이 지난 9월 29일과 11월 23일에 여수 손양원목사 묘역을 방문한 후 호남신학대학교 선교동산에 있는 45명의 선교사 묘역과 8백50명의 순교자 기념공원을 방문하였다. 무엇이 만 1백세이신 방지일 목사로 하여금 두 차례 방문하게 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면서 '선교'와 '순교'를 언급하게 하였을까?

손양원목사의 최후의 순간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손양원목사를 포함한 10명은 한 줄로 묶여서 현 여수시 둔덕동에 있는 과수원에 이르렀다. 맨 앞에 있는 차진국씨가 쓰러지고 그 다음으로 손양원목사가 차진국씨 위로 쓰러졌다. 그 무게에 차진국씨는 정신이 들었는데 나중에 확인한 결과 차진국씨는 총알이 겨드랑이 사이로 지나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손양원목사는 시신을 수습한 결과 그의 입주변이 뭉개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북한군이 저 입으로 예수님을 말하지 못하도록 총 개머리판으로 지속적으로 타격을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손양원 목사는 가느다란 소리로 "하나님 저에게 총을 쏜 저 청년은 아무것도 모르고 하였으니 죄 주지 말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한 마디의 기도를 지속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상의 내용은 당시 애양원에서 피신해 있던 필자의 숙모이며 고 차남진목사의 사모인 오마르다 권사(생존)와 차진국씨의 조카인 차숙철(생존)로부터 들은 생생한 증언이며, 필자는 이 사실을 '애양원과 손양원목사'라는 책에 기록하였으며, 금년 한 해 동안 손양원목사를 기리는 각종 집회에서 또한 증언하였다. 그렇다면 손양원목사는 누구이며 그의 삶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손양원은 1943년 5월 16일에 출감하는 날 신사참배 반대를 끝까지 고집함으로써 광주형무소에서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청주보호감호소로 이송되었는데 손양원은 하나님께 '광주 형무소에서 수감자들과 간수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를 주셨는데 대구와 청주에서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대로 학생시절부터 모든 상황에서 기도와 감사를 잊지 않고 불같이 기도하는 '손불'이라는 별명의 사람이었다.

손양원목사가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씨를 양아들로 맞아들인 후 자녀들에게 형과 오빠라고 소개하면서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딸에게 그 집에서 살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안재선을 대동하고 전국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에도 간증을 시키기도 하였다. 손양원목사의 태도는 성령님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인간개조의 확신'을 가진 것이었다.

손양원목사는 48세의 나이로 하나님께 갔지만 그는 목회자로서 자신이 발견한 성경의 진리와 자신이 했던 설교대로 '내가 행동하고 있는가'를 늘 반성하는 성자(省者)이다. 한문의 살필 성(省)은 화살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을 받지 않도록 나 자신을 살핀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살피다의 헬라어는 주먹으로 눈 아래를 때려서 검게 물들게 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손양원은 자신의 설교와 행동의 일치를 위하여 늘 자신을 살피는 성자(省者)였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言)을 이루는(成) 사람, 성자(誠者)가 되었다. 이렇게 자신을 살피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아들을 죽인 자를 용서하여 양아들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죽인 사람에게 죄주지 말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최후의 기도를 그대로 다 이루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감히 손양원목사를 성자(聖者)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교회에 손양원목사와 같은 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같은 부모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던 가족들과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차종순총장 /  호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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