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긴 한 마디

[ 목양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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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01일(수) 09:28

총각전도사로 어느 시골교회에 부임한 다음날 그 동리에 불교계에서 목소리 꽤나 낸다는 종씨 어른이 찾아왔다. 공손하게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더니 "자네가 이번에 부임한 곽가 전도사인가?" "예, 그렇습니다." "종씨가 왔다고 해서 찾아왔네만, ○○공파 몇 대 손인고?" 다행히 항렬이 높아 반말은 존댓말로 바뀌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자 교회에 출석하기로 어렵게 작정을 했다. 새벽마다 얼음을 깨고 불공을 드렸다던 그 실력으로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했고 믿음은 계속 눈에 띄게 성장하는 것 같았다. 만일 그분이 세례를 받고 교회의 집사쯤만 된다면 그 영향력 때문에라도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게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그분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큰 기대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1년쯤 교회를 다니던 어느날 그분이 찾아와서는 이제 다 믿었으니 내일부터는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일방적인 통지를 했다. 교인들과 어떤 큰 언쟁이 있었고 상처가 꽤나 컸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너무 열심이어서 새벽기도 나오지 않던 집사들, 교회 일하지 않던 집사들에게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지역을 전도해 보리라던 단순한 생각은 순간 물거품이 되었고 오히려 묘한 후유증이 감지되었다.

"모든 중생들에게는 불성(佛性)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계신다는데, 하나님을 먼저 믿는다는 사람들이 교인들을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가요?"

그가 떠나면서 나에게 일방적으로 던졌던 이 말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합장 배례를 하던 불심으로 볼 때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기독교인들의 교회생활이 하나님과의 종적관계는 이해가 되지만 횡적으로 인간적인 갈등과 불편한 관계들은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이라고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실 불교의 삼보(三寶)는 불,법,승(佛,法,僧)이다. 부처도 경전도 승려도 보(寶)이고, 모두 경배의 대상이다. 특히 승려는 출가승(出家僧)만 아니라 재가승(在家僧)도 보살이라고 호칭을 하며 부처와 동격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어 합장을 한다. 그러니 불교인들의 합장 뒤에는 온갖 갈등과 문제가 내포되어 있어도 그 인사법은 생불(生佛)에게 하는 존경과 경배의 성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산스크리트어의 중국어 표기)이라고 기도한다. '나무'는 귀의(歸依)한다는 뜻이고, 부처의 자격이 있지만 온 세상을 다 제도하기 전에는 보살로 있겠다는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겠다는 뜻의 고백적인 기원을 하는 것이다.

정치권에 있는 교회 중직자들이 표 구걸을 위해 절간을 찾아가 승려들에게 합장 배례하는 모습이 TV모니터에 보일 때, '단순한 인사이니 해도 괜찮다'고 누군가 이름만 대면 아실분이 권면을 했다는데 합장이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삼보경배이고, 별 부담 없이 '나무…'라는 말이 귀의한다는 고백이라면 어떻게 이걸 단순한 인사라고 권장할 수 있었는지 너무 무책임한 권면을 했다는 분노가 생기지만, 속내야 어떻든 절간에 가서 하는 인사치고는 신분에 맞춘 너무 공손하고 멋진(?) 인사가 아닌가?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과 동격은 아니고 경배의 대상은 아니라도, 그래서 불가(佛家)식 인사처럼은 안할망정 세상 사람들이나 초신자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처럼 신앙생활을 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해본다.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이 상대방에게는 왜 인정이 안 되는 걸까? 왜 나를 위해서 죽어주신 주님은 믿어지는데, 내 맘에 들지 않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왜 안 믿어질까?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을 내 맘이 잣대가 되어 수용하지 못하는 특권은 누구에게 받은 걸까? 나와 같지 않으면 안 되고, 다르면 틀린 거라는 획일적이고 편협한 사고의 틀은 왜 깨어지지 않는 것일까? 오케스트라 같은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 되는 아름다움을 성도들은 교회생활에서 기대할 수는 없는 걸까?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고, 우리는 부름 받은 자녀들이고, 같은 선교사명을 이루어 나가야 할 선교동역자들이며, 내가 이 일로 힘들 때 나를 도와서 주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할 협력자들이라면, 그래서 성령을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대인관계를 하고 서로 대한다면 교회의 분위가 어떻게 될까?

또 마지막 월력 한 장을 남기고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수평이동이 교역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계절이 되었다. 35년이 지났지만 교회를 떠나면서 햇병아리 목회자에게 던졌던,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그분의 이야기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것은 이런 숙제는 그 후에도 계속 내게 주어져왔음에도 솔직히 내 힘으로는 풀 능력도 없고 해결할 힘도 없어서 그 이름을 품고 엎드리다가 새로운 이름들과 또 다른 씨름을 시작하면서 그들은 망각 속에 묻어 둘 수밖에 없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곽종복 / 목사 ㆍ 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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