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 소식-태국과 미얀마 국경 '메솟'

[ 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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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6일(금) 15:10

   
▲ 태국 국경 지역의 미얀마 난민들.
허춘중
총회 파송 태국선교사
 
태국의 동쪽은 버어마의 서쪽 국경과 만난다. 북쪽 메홍손에서부터 남쪽 상글라부리까지 약 8백Km의 국경에 3백만 여명의 버어마 난민들이 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의 나라 땅에 들어와서 사는 이유는 정치적 위협과 경제적 가난을 피해서 자유를 찾아, 농토를 찾아서 온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거주의 자유가 없이 살자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는가? 이런 사람들을 국제 사회는 난민(Refugee)이라고 한다. 마치 일제 강점 시대에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이 중국의 만주벌판에서 활약을 하고 가난했던 우리 조상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 만주, 연해주로 이주를 해갔던 것과 비교가 될 것이다.
 
미얀마는 우리에게 버어마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버어마는 옛날부터 인도차이나에 강대국이었다. 군사적으로도 강하고, 문화와 지식기반도 풍성하고 좋은 지도력이 많은 나라였다.
 
이 나라의 불행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 특별히 135여개의 다른 종족의 연합체인 이 나라도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처럼 19세기 중엽에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48년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후에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정파와 종족 간에 혼란과 혼미를 거듭하였다. 이 과정에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영웅 아웅산 장군이 암살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 혼란을 틈탄 군대가 1962년 구테타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 50년간 수차례 국민들에 의한 자유화와 민주화 요구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급기야 1990년 총선거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주도한 '민주를 위한 민족 연합'(NLD)이 80%의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이때 민주적인 민간 정부를 세울 기회가 있었으나 군사정부가 정권이양을 거부하여 내전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무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이때 이곳 메솟을 중심으로 하는 난민캠프가 생겨났고 어느 듯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곳 사람들은 새 생명이 태어나도 출생신고를 할 곳이 없다. 처녀 총각이 사랑하여 결혼을 해도 혼인신고를 할 곳이 없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물론이고 직업을 갖거나 생산에 종사할  자유가 없다. 영구적인 집을 지을 수도 없고 사유재산을 가질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임시적이다. 이곳에 사는 것이 임시적이다. 개인의 생각이나 의지, 삶의 계획도 임시적으로 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떤 창의적인 계획, 장기적인 설계를 할 수가 없다.
 
국제사회는 이들을 정글 속에 이렇게 가두어 둔 채로 하루 두 끼 분의 식량, 약간의 소금과 식용유, 하루에 숯 덩어리 몇 개, 일 년에 바지 몇 개와 셔츠 몇 장, 집을 고칠 수 있는 대나무 몇 가지를 제공하고 있다.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이 빈둥빈둥 허송하는 세월 같이 살면서 20년이 지나왔다.
 
이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로 자신과 자신들의 자녀들의 삶을 누가 규정하고 책임져 줄 것 인지도 모른 채 절망적인 상태로 살고 있다.
 
지난 11월 7일, 버어마에서 총선거가 있었다. 20년 만에 하는 선거였으니 실로 많은 유권자들이 생전 처음 선거를 해보는 것이었다. 특히 버어마 같이 정보, 통신, 지식과 의사 전달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는 나라에서 20년 만에 선거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선거가  무엇인지, 무엇을 결정하는 것인지, 누가 우리 편인지, 혹 보복이나 후유증은 없을 것인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이 선거후에 조금씩이라도 버어마의 변화와 발전을 기대해도 되는 지는 의문스러웠다. 이런 의문 속에서 선거후에 작은 변화와 기대들이 생기고 있다. 소수이지만 야당이 의석을 가졌고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생겼고 무엇보다도 이웅산 수치여사가 오랜 강제 연금 상태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어 국민들을 향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거가 있던 그 다음날 이곳 국경에서는 정부군과 카렌군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순식간에 2만 명의 새로운 난민들이 발생하여 국경을 넘어 왔다. 전 세계 언론이 놀라서 이 사건을 주목했다. 버어마 정부가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시 국민들은 무력으로 탄압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한 순간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몇 일후에 이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아직도 이곳 메솟은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다.
 
어린이들 수 백 명이 공부 할 수 있는 학교가 한국교회들에 의해서 지어지고 있다. 메타오 병원을 통하여 의료선교를 실시하고 난민캠프의 여러 신학교를 지원하며 빈곤퇴치를 위하여 암소은행을 시행하고 청소년 기숙사를 통하여 장학사역을 하고 있다. 더 미래지향적으로 영성과 함께 청소년들에게 직업훈련을 실시하려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이런 속에 이곳에서 고난과 역경을 이기면서 살고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푸셔서 희망과 비전의 노래가 더 불러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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