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빚진 자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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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3일(화) 17:43

1904~1905년 광주 양림동 선교부의 유진 벨(Eugene Bell) 목사의 집 구경을 마친 부인들이 "아이고(I go) 이렇게 좋은 집을 보았으니 우리 집에서 어떻게 살고!"하면서 한탄하는 소리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의 가능성을 보았고, 실제로 1906년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1910년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를 증축하였으며, 교세가 5백여 명에 이르렀다.

광주 사람들의 시샘은 곧바로 배우고 익히는 열정으로 변하였으며 교회에 출석하고 선교학교에 자녀들을 보냈다. 그 때에 광주 남학교(숭일학교) 교장 프레스톤(John F. Preston: 변요한) 목사는 건물을 짓기 위하여 콩밭으로 사용하던 땅은 샀으나 건축비가 없자 미국의 친지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저 콩밭에 있는 콩알보다도 더 많은 아이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이 땅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건물을 짓는데 3천달러가 필요합니다."

건축이 끝난 지 금년에 1백년이 되어가고 있다. 그 사이에 그 학교에서 콩밭의 콩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고 예수님을 알았고 목사가 되고 또한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제1공화국 시절의 조정환외무부장관, 전라남도 초대 도지사 최영욱, '가을의 기도'를 쓴 시인 김현승교수, 서편제의 감독 임권택, 그리고 다 헤아릴 수 없는 목회자들, 장로와 집사들이 배출되었다.

초기 한국인 개종자들의 대다수는 사회의 하층민들로서 사회적 신분을 말하기 어려웠다. 백정, 무당, 마부, 가마꾼 등 사회 하층민들의 자녀들이 선교학교에 등록하여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1900년 서울 시내 4개 선교학교에 등록한 학생의 41%가 백정의 자녀였다고 한다.

얼마 전 연속극 '제중원'에서 볼 수 있었던 대로 백정의 자녀가 선교사를 만나서 예수님을 믿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부속으로 설치한 의학교에서 의사 수업을 받고 1908년에 최초의 7인의 의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서경조목사의 아들 서광호, 김필례의 오빠 김필순도 있었다.

남궁혁목사는 한국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전도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후원으로 배재학교에서 공부하고 1900년부터 인천과 목포 세관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였으나, 1906년에 예수님을 재영접하고 1922년에 목회자가 되었으며,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공부한 후 1925년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미군정청 시절에는 관세청장과 관재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3만명 이상의 한국인 선교사들이 해외에 나가서 교회를 세우고 있지만 더욱 급선무는 선교학교를 세워서 그 지방의 하층민들로부터 유지의 자녀들에 이르기까지 교육을 통한 복음화의 과정을 묵묵히 10~15년을 지속하게 되면, 졸업생들이 나가서 지역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고, 또한 그 국가를 변화시키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오늘날 아시아 전역의 제3세계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로부터 부러움과 시샘의 나라이다. 한국의 국가적 위상이 높고 재력이 크고 또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열정이 아직 뜨거울 때에 부지런히 피선교지의 교육에 투자하여 인가된 학교를 곳곳에 세우고, 젊은 청년들이 교사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 지방에서 한국의 언더우드, 한국의 마펫, 한국의 에비슨이 되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선교의 빚을 갚는 길이다.

차종순총장/ 호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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